초기불교/붓다의수행법·위빠사나·묘원법사

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6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1:2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좋다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아직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면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탐욕으로 차지했다면 이것은 독배를 받은 것입니다.

탐욕의 끝은 괴로움입니다.

때로는 얻지 못한 것이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생각도 없이 무조건 얻으려고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옥석을 가려서 선택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 와서 왜 여기에 사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생으로 끝인지 다음 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여러 가지 말들을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채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며, 무엇인가에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과거부터 내려온 인류의 역사이고

앞으로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문제의 답은 오직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이것이 법에 대한 고찰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를 가지고

정신과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깨달음의 요소를 실천해야 합니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대상을 고찰하면 몸과 마음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몸은 대상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몸입니다.

마음은 대상을 향해서 기울어지기 때문에 단지 마음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몸과 마음의 영역을 알아차리면

대상의 역할을 꿰뚫어서 알게 됩니다.

그러면 몰랐던 의문이 풀리고 지혜가 나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원인과 결과이며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 지혜는, 말로는 대상의 진정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결과로 오는 통찰지혜로 꿰뚫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지혜가 나면 어둠에서 붉을 밝히는 등불처럼

대상의 성품을 명료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상을 탐구해서 본 결과로 생긴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로 인해 확신에 찬 믿음을 갖습니다.

 

혼란스럽지 않으면 들뜸과 의심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갈 길이 분명하게 보여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한 고찰은 어둠에서 빛을 발견하는 것으로

등불을 밝히는 등대와 같은 것입니다.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는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법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법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법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생기도록 잊지 않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법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확립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7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오온, 12처, 4대, 4성제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해야 합니다.

5근의 기능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서 고찰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입니다.

 

정진(精進)을 노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음을 기울여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수행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인데

노력이 없으면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않고 달아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것도 노력이 있어야 하며,

수행을 지속하는 것도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수행에서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은 중요한 3가지 기능입니다.

이 3가지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노력입니다.

알아차림도 노력이 있어야 하며 집중도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집중이란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인데 이때 노력을 해야 알아차림이 지속됩니다.

 

마음은 그냥 저절로 머물지 않습니다.

반드시 머물도록 노력을 할 때만이 하나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력도 적절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노력을 하면 들떠서, 오히려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가 없어서

바르게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노력이 부족하면 게으름에 빠져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노력이 지나치면 산만해지고, 노력이 부족하면 나태해지고 졸음에 빠지므로

항상 적절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은 오근에서도 나타나며 오력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팔정도의 정정진이 바른 노력입니다.

그리고 7가지 깨달음의 요소에서도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마음의 노력과 몸의 노력이 있습니다.

노력은 마음이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는 것이라서 정신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만으로는 노력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노력에 육체적인 노력이 함께 따라주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노력만 있으면 생각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에서 정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경행을 해야 합니다.

경행은 정진력을 키우고 좌선은 집중력을 키웁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 노력한다고 하는 것은 경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적 노력과 육체적인 노력이 병행될 때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정신적으로 튼튼해집니다.

이러한 튼튼함이 법에 대한 고찰을 받쳐줍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좌절하거나 수행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노력이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힘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시기부터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래서 각각 지은 업대로 태어나고 죽습니다.

이렇게 윤회를 하는 동안 스스로 노력을 해서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기회는

인간에게만 주어집니다.

사악도와 욕계천상과 색계, 무색계에서는 노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해진 업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므로 노력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노력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입니다.

인간은 선한 노력을 해서 더 향상된 삶을 살거나 고통뿐인 윤회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선하지 못한 노력을 해서 더 고통뿐인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떤 노력을 하시겠습니까?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는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는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기도록 잊지 않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확립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11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악처에 태어나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노력을 해서 얻는 이익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벽지불과 모든 아라한과 성자들이 가신 길을 생각해야 합니다.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정법의 위대함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시는 스승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이 비구이거나 수행자이거나 수행을 할 수 있도록 된 신분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나 훌륭한 동료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부지런한 사람과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일에 모든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네 번째,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입니다.

 

희열(喜悅)은 기쁨, 열정, 환희 등으로 불립니다.

희열은 수행자가 원하는 대상을 얻은 것에 대한 만족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고 일정기간이 지나서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와, 법의 고찰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와,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계발되면 다음 단계인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납니다.

이때 만족하는 마음으로 인해 몸에 여러 가지 형태의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을 희열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빨리(pālī)어로는 삐띠라고 합니다.

 

이러한 희열은 행복과는 다릅니다.

희열은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한 뒤에 적절한 집중력이 생기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속합니다.

그래서 희열은 정신적 현상에 속하고 행복은 느낌에 속합니다.

 

여행자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은 희열에 속하고,

오아시스에서 발견한 물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주석서에서는 비유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희열을 얻게 된 뒤에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계속하면

나중에 행복한 느낌을 얻게 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계속하면 자신도 모르는 여러 가지의 현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희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수행 중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이런 현상으로 인해 놀라거나 또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다음 단계의 깨달음의 요소가 계발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답보상태에 빠지거나 아니면 퇴보합니다.

 

희열은 수행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 스스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빠르게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래서 몸에 희열이 나타나는 현상을 자신이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단지 나타나는 현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고개가 한쪽으로 휙휙 돌아간다던가,

잠자리에서 발이 위로 ‘들썩’하고 들리는 현상도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바늘로 온몸을 찌르는 것 같은 느낌도 있으며,

전기에 감전된 것과 같은 찌릿함과 전율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다음 단계의 지혜로 발전하기 때문에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서 더 높은 단계의 지혜에 있다가

낮은 단계의 지혜로 떨어질 때는 이런 희열이 다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때도 희열이 나타났으면 다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경험이 많은 수행자는 집중수행을 할 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희열이 나타나는 과정을 압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열로 인해 현재 자신이 어느 상태에서 수행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열은 또 다른 의미에서 수행자의 수행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미 희열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뒤에 다시 희열이 나타나면 수행이 뒷걸음질 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행이란 항상 높은 수준의 정신적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지혜도 더 높은 지혜에 있다가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희열이 나타는 현상을 열반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의 과정에서 유사열반이라는 것이 5가지가 있습니다.

희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절대로 열반을 생각하면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정신세계에서는 열반을 입에 올리는 것을 금기로 삼습니다.

 

정신세계의 열반은 결코 자격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성취한 진실한 수행자는 이런 것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입에 올릴 때는 천박한 번뇌를 입에 올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처음에는 열반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으며

설령 열반을 체험했다고 해도 자신이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오직 열반을 경험한 스승에 의해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열반에 대해서 말한다 해도 직접 경험한 수행자가 아니면 열반의 실재를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열반의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단계적 지혜의 발전과정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