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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7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2:2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하는지 뜻을 세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숙고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필요한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하는 것을 잊지 않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살면서 불필요한 일에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과 무관한 일은 단지 호기심일 뿐입니다.

모든 강물을 전부 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잔의 물은 짜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전부 구제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자신을 돕고 남을 돕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대념처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만나면 바람직하고, 기분이 좋고, 유쾌한 대상이 있다.

또 나의 행복, 이익, 안락을 원하고,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사람,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자매들, 친구들, 동료들, 친척들, 혈족들이 있다.

 

그런 대상들과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오지 못하고, 그들과 사귀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섞여있지 못하는 것,

이것을 일러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태어나기 마련인 중생에게 이런 소원이 일어난다.

! 우리가 태어남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 우리에게 태어남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늙기 마련인 중생에게 이런 소원이 일어난다.

! 우리가 늙음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 우리에게 늙음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병들기 마련인 중생에게 이런 소원이 일어난다.

! 우리가 병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 우리에게 병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죽기 마련인 중생에게 이런 소원이 일어난다.

! 우리가 죽음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 우리에게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을 겪기 마련인 중생에게 이런 소원이 일어난다.

! 우리에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을 겪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 우리에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요약하자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의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色取蘊],

느낌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受取蘊],

인식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想取蘊],

마음의 형성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行取蘊],

의식에 대한 집착의 무더기[識取蘊],

이것을 요약하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의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라고 한다.”

이상이 대념처경의 고성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괴로움이 있을 때는 괴로움이 있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일어났을 때는 괴로움이 일어났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소멸되었을 때는 소멸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이것이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시작부터 끝까지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나타난 대상을 분리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것만이 괴로움이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가지고 사는 한 괴로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있기 마련인 것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이것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번뇌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처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가 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괴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만 있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인 것을 밝히고

괴로움의 소멸은 가능한 것이고

이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팔정도 위빠사나의 길로 갈 것을 밝히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태어남은 윤회의 여정이 새로 시작되는 전환점입니다.

그래서 온갖 생존경쟁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 즐거움이 괴로움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태어남은 괴로움의 시작입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고 있는 것이 무명입니다.

무명은 쓴 것을 달콤한 것으로 알게 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게 합니다.

 

늙음도 괴로움입니다.

누구도 이 세월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매순간 늙어가고 있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더욱 두려운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태어났으면 죽어야 하지만

누구도 죽음을 즐겁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과 고통은 없습니다.

 

태어나면 늙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데

누구도 이것을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은 우리의 일상의 일입니다.

생존의 실재를 자각하면 이토록 괴로움뿐입니다.

 

누가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괴로워서 울부짖는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이러한 괴로움에 당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좋은 것만 만날 수는 없습니다.

싫어하는 것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의지대로 산다고 해도

이 세상은 온통 자신과 다른 것들로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선택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뿐더러 항상 좋아하는 것과 이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남도 고통이고 헤어짐도 고통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온 자체가 괴로움의 온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온을 집착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영속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수행이고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만이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괴로움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현상이지

이것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와서 보라고 나타난 현상에

오히려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것이 모든 생명들의 삶입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괴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수행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입니다.

 

다음은 대념처경의 사성제 중에서 집성제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다시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롭게 태어남을 일으키는 갈애이다.

쾌락과 탐욕을 동반하고,

항상 새로운 기쁨을 지금 여기저기서 찾으니,

이른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그리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코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몸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마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보이는 형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소리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냄새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맛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감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안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이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비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설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신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의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귀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코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혀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마음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마음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보이는 형상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소리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냄새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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