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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7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2:28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움의 실체는 불만족 입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모두 괴로움 속에서 진행됩니다.

사는 동안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두 변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간단치 않은 일이라서

어느 누구도 불만족으로부터 해방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도 매 순간 변하는 것이어서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기억하여 가지고 가기 때문에 괴로움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원래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분명하면 괴로움은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괴로움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지 결코 견고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대념처경의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에 관하여 경전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셋째,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다시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그럼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코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몸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마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보이는 형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소리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냄새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맛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감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안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이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비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설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신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의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눈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귀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코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혀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몸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마음의 감각접촉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코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혀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마음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눈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귀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코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혀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몸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마음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보이는 형상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소리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냄새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맛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접촉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법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소리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냄새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맛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접촉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법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소리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냄새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맛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접촉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법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소리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냄새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맛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접촉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법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라고 한다.”

 

이상이 대념처경의 멸성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고성제와 집성제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진리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괴로움이 소멸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세속의 진리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출세간의 진리입니다.

 

무엇이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것은 조건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괴로움도 일어날 조건이 소멸하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일어나지 않아서 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죽지 않는다는 것도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멸성제는 갈애가 소멸하여 얻는 열반을 의미합니다.

고성제와 집성제의 소멸이 멸성제인데 이것은 갈애가 소멸한 것입니다.

갈애는 바라는 마음으로, 욕망입니다.

3가지 갈애인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완전하게 소멸되어야

비로소 갈애가 소멸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애가 소멸하는 것을 경전에서는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갈애가 소멸되지만

오직 지혜로서만이 갈애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물리적 방법으로는 갈애를 결코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갈애를 지혜로 소멸시키지만 유신견을 가진 사람은 제외됩니다.

유신견을 가지면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여 지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가장 큰 무지를 유신견으로 봅니다.

 

갈애의 완전한 소멸은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가장 순수한 정신적 상태가 유지될 때 열반에 이릅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갈애가 소멸됩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진리를 깨달을 때 도의 의식이 일어납니다.

갈애의 소멸은 바로 이러한 도의 의식에 의해서 제거됩니다.

이때의 도의 의식이란 지혜가 있는 의식을 말합니다.

 

갈애의 소멸은 과거의 갈애와, 미래의 갈애와, 현재의 갈애를 모두 소멸시킨 것입니다.

이때 도의 의식이 인위적으로 과거의 갈애를 뿌리 뽑는 것이 아닙니다.

도의 의식이 있는 순간에는 어떤 번뇌도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애가 붙을 자리가 없어서 뿌리 뽑히는 것입니다.

 

미래의 갈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의 의식이 있는 순간에는 번뇌가 침투하지 못해서 갈애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현재의 갈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의 의식이 있는 순간에는 번뇌가 침투하지 못해서 갈애가 뿌리 뽑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렇게 도의 의식으로 갈애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도의 의식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도의 의식이 지속되어서 이것이 새로운 습관이 될 때라야 갈애가 완전하게 뿌리 뽑힙니다.

 

그렇지 않고 적당히 알아차리다 말면

있던 욕망이 수그러들지 않아서 완전하게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란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순간에 성스러운 마음을 가지면 성스러움을 얻어서 이익이 있고,

이 순간에 번뇌가 침투하지 않아서 이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의 의식이 번뇌를 뿌리 뽑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수반된 도의 의식이 있는 순간에는

하나의 마음밖에 없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는 수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최고의 지혜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는

도의 의식이 생기면 번뇌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없어집니다.

 

이러한 토양이 없어지는 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곳에서

오온이라는 생명이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살 수 있는 토양이 있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지혜가 나지 않아서 갈애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완벽하게 대상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지속할 때 갈애가 붙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