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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74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2:2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자가 그럴 수 있냐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수행자는 아직 수행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살아가려는 선한 싹을 잘라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과정입니다.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합니다.

수행자는 방황하고 있는 괴로운 사람입니다.

괴롭지 않으면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고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문제가 많을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가 계발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성숙합니다.

이러한 수행자 입장을 모르면 수행 자체를 완성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를 평가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는 것이 바른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대념처경의 집성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접촉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법의 인식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보이는 형상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소리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냄새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맛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접촉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법에 관한 의지작용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소리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냄새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맛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접촉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법에 대한 갈애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소리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냄새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맛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접촉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법에 대한 일으킨 생각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보이는 형상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소리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냄새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맛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접촉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법에 대한 지속적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라고 한다.”

 

이상이 대념처경의 집성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괴로움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한 행위에 따른 과보가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여기에 어떤 타인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업을 행할 때 타인과의 관계가 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도 있지만

현재에도 스스로 선택해서 일으키는 것도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은 업의 형성으로 인해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현재 일으키는 것은 업의 생성으로 인해 새로 받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은 느낌으로부터 시작해서 갈애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느낌은 반드시 더 좋은 느낌을 원하여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러한 갈애가 집착이 되어 고통뿐인 태어남을 가져옵니다.

 

갈애는 온갖 종류의 바라는 마음입니다.

갈애는 그냥 갈애로 있지 않고 집착을 해서 행위를 하게 하기 때문에 업을 만듭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이러한 갈애는 느낌에서 일어나는데 느낌은 6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더 좋은 갈애를, 더 많이, 더 빨리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갈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잘 살고 싶고, 괴로워서 죽고 싶은 갈애도 있습니다.

 

갈애는 좋은 뜻으로는 희망이지만

우리의 갈애는 희망으로 멈추지 않기 때문에 항상 문제를 야기합니다.

갈애는 탐욕을 동반하기 때문에 멈추지 않는 욕망의 기차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끝없고 위험한 질주를 계속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욕망의 기차에 실려서 몸을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과연 누군가가 자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저 습관적으로 과거의 업에 의해서 떠밀려가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의 갈애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는 항상 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상견으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이 생으로 끝이라고 하는 허무주의와 단견에 속하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갈애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냥 필요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여기에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손해인 것 같아도 가장 큰 이익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남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나만 바라지 않는다면 나만 손해가 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이러한 나는 없습니다. 그냥 몸과 마음일 뿐입니다.

이것을 소유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그러니 단지 필요한 일이라서 해야 합니다.

일하고 먹고 생활하는 것이 단지 필요한 일이라서 하면

최고의 지혜가 나서 모든 번뇌가 불태울 수 있습니다.

 

눈이 형상과 마주칠 때 눈이라는 감각기관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형상을 통해서 들어오는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이 제거됩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귀라는 감각기관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소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코가 냄새를 맡을 때 코라는 감각기관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면

냄새를 통해서 들어오는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맛을 느끼는 것과 신체의 접촉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감각기관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갈애는 즐거운 것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일어난 곳에서 자리 잡습니다.

 

일어남은 새로 생기는 것이고,

자리 잡는 것은 일어난 것이 다시 되풀이 되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어난 것은 수면 아래로 잠재해 있다가 필요할 때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일어난 갈애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갈애는 일어나는 단계가 있고, 잠복하는 단계가 있고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갈애에 이끌려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현재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조건이 성숙되면 욕심을 부리고 조건이 성숙되면 화를 냅니다.

그래서 갈애가 있을 때도 알아차려야 하고

갈애가 없을 때도 똑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잠복한 갈애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갈애는 일어난 곳에서 다시 저장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감각기관은 모두 갈애를 일으키는 곳이고

그 감각기관에 모든 갈애가 저장됩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성숙해서 다시 일어납니다.

이러한 갈애를 알아차려서 단지 느낌으로 머물 때

위빠사나 수행자는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간은 과거에는 모르기 때문에

무명에 이끌려 업을 행해서 현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갈애에 이끌려 살고 있기 때문에

탐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윤회를 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무명은 우두머리이고 갈애는 동반자입니다.

이 무명과 갈애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원인입니다.

 

누구나 몰라서 괴로움뿐인 갈애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무명이 함께 소멸합니다.

무명과 갈애는 한 몸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갈애는 사소한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것을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반드시 집착을 일으킵니다.

 

이때의 집착은 떨어지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강력하게 대상에 침투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행위를 일으키도록 합니다.

이 행위가 바로 업의 생성입니다.

 

이때 업의 생성은 의도가 있는 행위라서 과보가 생깁니다.

그래서 업의 생성으로 인해서 한 대로 미래에 다시 그 과보를 그대로 받습니다.

 

우리가 업이라고 할 때는 과거의 형성된 업이 있고 현재 생성하는 업이 있습니다.

과거의 형성된 업으로 우리는 오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 생성하는 업으로 미래에 태어남이라는 결과와

지금 이후에 과보를 받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업의 생성은 업의 힘입니다.

행위는 일어난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나 행위를 한 힘은 과보로 남겨져서 다음에 상속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업의 굴레가 다시 번뇌의 굴레를 일으키고 번뇌의 굴레가 다시 괴로움을 일으킵니다.

이런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집착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을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어떤 경우나 작은 것에서부터 더 큰 것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알고

항상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갈애라는 바이러스는 6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6가지 감각대상에 묻어서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6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지켜야 하고

6가지 감각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려야 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6가지 아는 마음을 면밀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6가지 마음을 다 알아차릴 때

비로소 갈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 갈애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도과를 성취하여 지고의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