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21

通達無我法者 2010. 12. 31. 19:4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연기의 사슬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선해야 되는 것이고 선하다는 것은

관용 그리고 지계, 수행을 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하다는 것은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이는 관용과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 일과

마음을 계발하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관용을 보이면 베푸는 마음이 뒤따르고

계율을 지키면 자신과 남에게 이익을 주며

수행을 하면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에서 탈출하는 방법들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율을 어겨 청정하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지 않아서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괴로움입니다.

이 괴로움이 윤회하는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세 가지 선한 것과 선하지 못한 것의 선택은

바로 알아차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관용과 계율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관용과 계율, 수행 이 세 가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연기에서 탈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크게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으로 구별합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시기 전에는 사마타 수행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연기를 아신 뒤에, 연기 속에서 오온을 발견하시고

오온의 느낌을 통찰하신 결과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셔서

해탈의 길로 가셨습니다.


그 방법이 8정도, 계정혜 3학, 중도, 위빠사나입니다.

8정도나 계정혜나 중도나 위빠사나는 모두 같은 말입니다.


사마타라고 하는 말은 우리말로 고요함을 얻는 선정 수행을 말합니다.

한문으로는 멈춤이라는 뜻으로 지(止)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실재하는 현상이 아니고 관념적인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고요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행이라는 것들은 모두 사마타입니다.

기도를 한다, 절을 한다, 뭘 한다하는 것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윤회하는 세계에 머물면서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선택하는 대상은 실재가 아닌 관념이며

이것은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번뇌를 억누르는 형태의 수행을 말합니다.


이때 이 사마타의 대상은 고유한 특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관념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장미꽃이라고 말할 때는 장미꽃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그 실재는 장미꽃이 가지고 있는 향기입니다.


이러한 사마타 수행과 다른 위빠사나 수행이 있습니다.

위빠사나는 몸과 마음이라는 실재하는 대상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수행입니다.


사마타 수행이 선정 수행으로 고요함을 얻는 수행이라고 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 수행으로 열반의 해탈에 이르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삼법인의 지혜를 통찰하여 궁극의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위빠사나라는 말은 주객을 분리해서 주시한다는 뜻입니다.


위(vi)는 다르다, 분리하다 라는 말이고.

다르고 분리해서 봄으로서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사나(passna)는 통찰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대상을 겨냥하고,

겨냥한 대상을 지속한다는 의미까지가 있습니다.


사마타수행은 근본 집중을 해서 대상과 하나가 되는데,

위빠사나는 실재하는 느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에 ,

근본 집중이 아닌, 찰나 집중을 합니다.

바로 그 찰나 집중을 통해서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밀착하는 수행만 해왔는데

이 수행은 대상을 객관화해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대상의 법의 성품을 봅니다.

그래서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비로소 대상의 바른 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에 빠져서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숲 속에서는 숲의 모습을 모두 볼 수가 없듯이,

숲 밖에 나와서 비로소 숲을 지켜볼 때

숲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통하는 지름길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바로 모든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수행을 단하나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생긴 번뇌는

몸과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의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모든 번뇌가 몸과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릴 대상을 몸과 마음으로 한정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것은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일체를 알았다!’

‘모든 것을 알았다!’ 라고 말하는

일체나 모든 것은 부처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는 것을

때로는 오온으로 볼 수도 있고,

때로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입니다.

이 수행이 있기 전에는 오직 사마타 수행밖에 없었지만

이 수행을 통해서 부처가 가신 길을 우리가 이제 가야합니다.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경전에 기록되기를 열반에 이르는 길은 네 가지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사마타 수행을 한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는 길,

둘째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는 길,

셋째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해서 열반에 이르는 길,

넷째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오직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

이 네 번 째 길을 순수 위빠사나, 또는 숫다 위빠사나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사마타가 없기 때문에 건관자,

위빠사나 수행자를 건관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사마타는 멈추는 수행이고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으로 보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한문으로는 지관(止觀)법이라고 말합니다.

저희 나라에 있는 천태종에 천태지관법이라는 것이 옛날에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본다면 오늘 저는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왜 해야 되는 것인가요?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합니다.

왜 지혜를 얻어야 되는가요?

지혜만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바로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누구나 특별히 괴롭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행복한 것도 괴로움입니다.

언제 이 행복이 사라질지 몰라서 괴롭고,

더 행복하지 못해서 괴롭고,

다음에 이와 같은 행복이 오지 않았을 때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런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무료하고 심심해서도 괴롭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행복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괴롭기 때문에

좀더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해서 괴롭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찾아나서는 중에 우리가 수행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행을 선택했다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실천 없이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다 맡기고 매달리면 편안할 텐데,

이 수행이라는 것은 고생을 사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달려보아도 별것이 없어서 수행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처음부터 지혜가 나서 수행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건 선택을 한 것인 만큼 이 선택은 좋은 결과를 줄 것입니다.

이 결과의 확인은 누가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수행을 한 스스로가 알게 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먼저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면서 알지 못하고 살았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심히 살았습니다.

깨어서 대상을 별로 본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대로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난 이래 모든 마음이 밖으로 향해져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밖에서 구했습니다.

그러나 답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부처를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가 과연 일생을 살면서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얼마나 알아차렸으며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거의 우리는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을 살 때 알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이 되었든 대상을 깨어서 자세히 알아차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도 하고 있다고 분명히 알지 못하고 행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할 때는 이것을 분명하고 자세하게 알면서 행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반드시 집중이 생기고

그 집중의 힘으로 지혜가 나서 대상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일러 수행이라고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바와나’라고 해서 마음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계발하면 자연스럽게 몸에도 많은 치유능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저의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승님!

수행을 하면 건강이 좋아집니까?

제가 병이 있는데 수행을 통해서 병을 좀 낫고 싶습니다. 라고 질문하면

스승께서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수행을 하면 마음이 계발되어서 치유능력이 있는데

저의 스승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병을 나으려고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차린 결과로 청정한 마음이 몸의 치유능력을 주는,

자연스럽게 오는 결과로 병이 낫는 것이지

처음부터 병을 나으려는 바람으로 하면

바른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처럼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수행의 참뜻을 알리기 위해서

저의 스승은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의 스승들은 이 수행을 하면 병이 낫는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스승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없이 알아차리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는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행위가 있고

여기에 곁 드려지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중입니다.

이 집중을 ‘사마디’라고도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찰나 집중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집중이 될 때만이 우리가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있고,

대상의 성품을 보아야 갈애가 끝나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고자하는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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