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23

通達無我法者 2010. 12. 31. 20:4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유명한 것과 훌륭한 것은 다릅니다.

유명한 만큼 더 세속적일 수도 있습니다.

훌륭해서 유명하기도 하지만 세속적이어서 유명하기도 합니다.

유명해지려고 해서 훌륭하지 않으며, 유명해지기를 바라지 않아서 훌륭합니다.

수행은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하게 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번뇌도 자신이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는 지혜도 자신이 만듭니다.

불행도 자신이 만들고 행복도 자신이 만듭니다.


불행은 감각적 욕망으로 생기며 행복은 수행의 지혜로 얻습니다.

우리가 나쁘기 때문에 좋아질 수도 있지만, 나쁘기 때문에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삶은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자신의 마음가짐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수행의 이익을 모릅니다.

그래서 수행을 손해 보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있는 자는 수행의 이익을 알지만 생각으로 그치고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공덕을 쌓은 자는 수행의 이익을 알아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의 고요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선한 자는 수행에 대한 확신을 갖고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수행을 하면 마음이 청정해져서 번뇌가 제거되고

슬픔과 비탄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뇌가 극복되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게 됩니다.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을 성취하여 고통뿐인 기나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이 길이 수행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몸을 알아차릴 때에 호흡, 망상, 통증, 가려움, 졸림...

이런 것들이 나타날 때 무엇을 알아차려야 될까 방황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들이 한 순간에 마음은 하나의 대상밖에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워낙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대상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빠른 순간에도 마음은 하나밖에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할 때에 두세 가지 대상이 나타날 때는

먼저 이곳저곳으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하나의 대상을 선택해야합니다.

이때 일반적으로 강한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강한 대상을 선택한 뒤에 차츰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때로는 오히려 강한 대상보다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처음에는 아는 힘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대상을 밖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고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밖으로 나가면 시비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그 힘이 축적되면 밖에 있는 대상을 지켜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여러 가지 대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만을 고집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손님처럼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대상에 접근하여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고정 관념들이 망상으로 튀어나온다면

오히려 그것은 기회인 셈입니다. 

이런저런 망상이 많이 떠오른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 지금 내가 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것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같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결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수행은 일단을 알아야하는데, 먼저 나타난 대상을,

그리고 강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그러나 알 것도 많고, 알아차리는 방법도 자기 욕심으로 대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혼란 때문에 일정한 수행지도자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체험한 것을 보고하고 적절한 답변을 듣는 것이 수행이 발전합니다.


이것은 부처님 이래로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혼자서는 결코 깨달음의 길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앞서서 경험한 스승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면담의 과정을 거칩니다.

왜냐면 면담 없이 한발도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판단하고 자기 혼자 내린 결정은 바르지 못합니다.

저도 과거에 미얀마에서 수행을 할 때 늘 스승께 이런 고통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수행이 안 됩니다. 괴롭습니다.’

그러면 스승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판단은 내가 한다. 너는 단지 일어나 것만을 보고하라.

너는 지금 매우 수행을 잘하고 있다.’


‘아닙니다, 수행이 안 됩니다.’


‘바로 그것이 네가 판단하는 것이다. 너는 겪어야 될 과정을 지금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이란 것은 잘되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잘 안되는 과정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수행입니다.

어느 날 잘되면 그 순간 교만심에 사로잡혀서 수행이 퇴보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잘 안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수행이라고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좋은 것을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잘 되건, 되지 안 건, 똑같이 모두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아셔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할 때에 무엇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에 대한 것 못지않게

무엇을 알았는가에 대해서 보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고의 과정은 제대로 알아차리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기회이지만,

또 더 열심히 알아차리도록 노력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점검 외에 보고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도 있습니다.

수행은 이렇게 총체적으로 진행되어야만 바르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먼저 무엇을 알아야하는가가 필요하고,

어떻게 알았는가가 뒤따라야 되고,

알았으면 그것이 정리되어서 보고 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러한 명확한 과정이 있어야 제대로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고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선 자기의 내면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랑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이 해야 됩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스승은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마음 같은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스승에게 면담을 할 때에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떤 답변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순간의 마음과 같은 순간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답변을 들었어도 면담을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는

엄청난 수행의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 면담을 하루하면 3일 정도 면담의 효과가 지속됩니다.

이렇게 수행은 혼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수행을 시작한다는 것은 바라는 것 없이 해야 합니다.

바라는 것 없이 한다는 말은 매우 생경한 말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에서는 갈애가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갈애는 반드시 집착을 하게 되고 업을 생성해서 태어남이라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바라는 것 없이 단지 필요해서 있는 그대로 대상을 지켜보아야합니다.


산다는 것이 모두 바라는 것뿐인데 처음부터 이러한 수행을 하면 바로 부딪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수행은 바라는 것 없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라지 않고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이 길로 가기위해서는 바라지 않는 새로운 길을 가셔야 됩니다.

가야할 길이 아무리 험하고 멀더라도 우리는 이 길을 가야합니다.

안 해보던 것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안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바라는 것과 함께 없애려고 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바라고 없애려고 하는 것이 모두 탐심과 진심, 성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바라고 없애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수행이 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 힘든 것이라고 알아야합니다.


수행을 시작하려면 좌선을 하기 마련인데,

좌선이란 것은 일정한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기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아프고 졸리고 망상이 떠오르고 가렵고 해서 괴롭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이러고 앉아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해서 또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호흡을 알아차리라고 하는데 잘 알아차리기도 힘듭니다.

이 호흡을 알아차려서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라는 의심도 듭니다.

이렇게 별로 볼 것도 없는 하찮은 것들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자신이 한심한 생각도 듭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은 바로 이런 괴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입장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라는 시제가 항상 따라야 됩니다.

현재에 있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알아차려야 됩니다.

거기에 좋고 싫고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하찮은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마음이 그 순간 하찮다고 여기는 것을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들어올 수 없다는 매우 귀중한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대상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나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에, 깨어서 대상으로 아는 마음만 있을 때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에는 이것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은 마치 발정한 코끼리와 같다는 경전에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것을 시비하고 온갖 것을 비난하고 온갖 거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의 대상을 집중할 때,

적어도 코끼리의 코처럼 이것저것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청정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의 이익은 여러분들이 처음부터 알 수가 없습니다.

결과는 그냥 그 걸음으로 갈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지

결과를 얻으려고 하면 결코 결과는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수행은 바로 이렇게 괴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부처님께서 찾아내신 훌륭한 수행 방법입니다.


현재를 알아차리는 대상은 자신의 호흡이 가장 뛰어납니다.

또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세상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몸을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서

악업을 짓고 차별을 일으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여러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앉아 있으면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괴롭고 즐겁거나 덤덤하거나 하는 현상들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특별히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수행이라면 어떤 특별한 것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인식의 전환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나타난 대상을 객관화해서 내가 개입하지 않고 알아야하는데

그런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 어려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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