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22

通達無我法者 2010. 12. 31. 20:3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맛은 수행을 해서 얻는 법의 맛입니다.

법은 항상 그 뜻이 잘 나타나있으며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가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며,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열반으로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현명한 사람에 의해 직접 체험되는 것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바람처럼 자유로운 법의 맛을 봅니다.

여러분! 오늘도 법의 맛을 함께 보는 방법에 대해서 공부해보시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과 집중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알아차림과 집중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이 없으면 밭에 씨를 뿌리고 거름도 주지 않고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노력은 조건을 충분히 충족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의지입니다.

수행을 할 때 노력은 안하고 결과만 가지고 탓하는 것은

욕심과 성냄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수행 시작하자마자 바로 좋은 결과를 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행이란 전에 없던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수많은 생에 동안에 내려져온 축적된 성향, 

그 습관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단 한순간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새로운 습관은 반드시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에 의해서만이 가능합니다.

물론 제일 앞에서 신뢰에 의해서 생긴 믿음이 이끌어야 됩니다.

이 믿음이 앞에서 이끌면 자연스럽게 노력이 따르게 되고,

노력이 따르면 알아차림이 되며,

알아차림과 노력이 함께할 때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서 집중이 됩니다.

이런 집중의 결과로 지혜가 납니다.

이렇게 생긴 지혜는 앞에서 믿음과 함께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을 또 이끕니다.

이때 법이 앞에서 이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믿음이 앞에서 이끄는 그런 과정까지 부단히 노력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알맞은 조건이 이렇게 성숙되면 어둠에서 전기불이 켜지듯이 

한 순간에 어둠을 밝히는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는 확실히 안다는 것이고, 알았기 때문에 번뇌를 자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생각은 알고 말아서 반복, 되풀이 하지만, 지혜는 완전히 알았기 때문에

대상의 성품을 바로 보아서 잘못된 것을 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매우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이지 못하다면 단 얼마간도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은 언제나 현재에만 가능합니다.


설영 우리가 과거나 미래를 생각한다 해도

현재라는 입장에서 알아차리면 그것이 알아차림에 속합니다.

과거나 미래로 거의는 갑니다.

그런데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네!’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만 남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걱정할 때도

‘지금 두려워하고 있네!’ 라고 미래로 간 자기 마음을 알아차린 그 순간

현재로 돌아와서 알아차림이 지속되며 그것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나 알아차리는 자와

현재라는 시간위에서 아는 것이 함께 가야합니다.

과거나 미래에서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로 와야 수행이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깨어있는 현재의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것을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과 마음입니다.

우리가 특별한 것을 말하는 줄 알지만, 실상 우리들의 삶에서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6문과 6경이 부딪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딪쳤을 때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6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6문과 6경이 부딪친 것을 열두 가지 장소라고 해서 12처라고 말하고,

거기에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을 포함해서 18계라고 합니다.

이 18계는 바로 정신과 물질의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벗어난 것은 불교의 세계관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45년간 설법하신 것은 오직 한 인간의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는가? 그것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과거나 미래를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를 말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한 것이지

꼭 과거를 목표로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목표로 말씀하시진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은 별것이 아닙니다.

뿐더러 호흡도 알아차려야 할 대상의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도 단단하고 부드러운 것, 가볍고 무거운 것, 따뜻하고 차가운 것,

그다음 몸의 움직임, 찌릿 거리는 것, 두근거리는 것, 아프고 가렵고

졸리고 하기 싫은 것, 또 좋아하는 것, 이런 단순하고 실재하는 것,

현실적인 것들이 바로 모두 알아차릴 대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수행은 특별한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결코 특별한 것을 알아차려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지금 여기에 있는 정신과 물질에 관한 모든 것이면 됩니다.

그래서 수행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 사실은 어찌 보면 시시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모두 그것들은 실재하는 현상이라서 가장 고귀한 대상입니다. 

이런 잡다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모두 소중한 대상이고 손님으로 찾아온 것들입니다.


여러분들! 나타난 대상은 무엇이 되었거나 손님입니다.

손님은 너무 박대해서도 안 되고, 너무 반겨서도 안 되고, 정중하게 대접해야합니다.


바로 위빠사나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나타난 모든 현상을

손님을 대하듯이 정중하게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무엇은 좋고 무엇은 안 된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에 나타난 실재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모두 진실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그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단지 ‘미워하고 있네!’ ‘욕심을 부리네!’ 라고 알아차리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좋고 싫고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있는 것이면 모두 우리가 알아차려야 될 대상입니다.

이렇게 찾아온 손님을 내쳐서는 안 됩니다.

찾아온 손님을 없애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찾아온 손님에게 무엇을 바라서도 안 됩니다.

그냥 단지 손님으로 맞이하면 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입니다.


이때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단지 주인으로서

손님을 지켜보는 그런 과정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런 모든 대상들은 잘 차려진 밥상의 밥과 반찬들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차려진 밥상의 밥과 반찬은 다 먹어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좋은 것만 골라먹으면 남아있는 것들이 부패하거나 냄새가 납니다.

그것이 번뇌입니다.

편식을 하지 말고 이것저것 모든 것을 다 먹어야 고요하고 평등심의 상태가 됩니다.

좋은 것만 먹으면 탐심이고 싫어서 안 먹으면 성냄입니다.

수행 중에 나타난 모든 대상은 설영 그것이 괴로운 것이나 즐거운 것이나

똑같이 단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럴 때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아직 우리는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의심을 풀고 수행 하려고 하지 말고, 수행을 하면서 의심을 풀어야합니다.

의심은 자기의식이 고양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알았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직 모르는 지혜를 설명해주어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의심이 났을 때는 ‘지금 의심하고 있네!’ 라고

의심하는 그 자체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나 간단한 이유는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붙여놓으면서

몸과 마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아 고요함이 생깁니다.

마음이 달아나서 하는 일이란 차별과 시비와 탐심 성냄 그런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달아나는 마음을 몸에 붙여서 온전히 대상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달아나면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붙여놓고 고요한 집중의 상태를 얻고자하는 것이

수행의 일차적 목표입니다.

알아차림이 있을 때 계율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마음이 밖으로 나가서

남을 비난하거나 욕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합니다.

이때는 바로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그것들이 단지 대상이기 때문에

어떤 번뇌도 들어올 수가 없을뿐더러 항상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것은 consciousness,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정신 자각이라고 하는데, 자각은 보통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의식은 감각 또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게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느낌과 아는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을 우리는 정신 상태라고 말합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가서 분명하게 깨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할 때 하는 것을 모르고 무심히 하지만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할 때 하는 것을 자각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릴 대상을 확실하게 선택하여 밀착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이런 알아차림을 빨리어로 사띠라고 합니다.

이 사띠를 또 다른 말로는 mindfulness, awareness, look, see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 주시, 관찰, 보다, 이해하다가 모두 동의어입니다.

이때 이런 알아차림은 깨어서 대상을 지켜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야합니다.


‘사띠’라고 말하는 빨리어를 더 자세하게 말하면 ‘사따빠타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빠타나는 면밀하게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상을 늘 깨어서 밀착해서 자세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으로 살아갈 때처럼 알지 않고, 대상을 확실히 깨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직접 체험하는 것이며 언어의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언어 저편에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인식을 뛰어넘어 대상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는 것을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라고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쉽고 단순한 것 같아도

알아야할 대상이 많아서 의외로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하게 어느 것 하나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지 않고

나타나는 대상을 그때마다 모두 알아차려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 무엇을 알아차려야 될까라고 망설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때는 가장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좌선을 할 때는 호흡을 보지만,

망상이 나타나거나 통증, 가려움, 졸림, 하기 싫음이 나타날 때는

그것이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그때마다 모른 체 하지 말고 나타난 것들을 그 즉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선택입니다.

꼭 특별한 것을 하나만 선택해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나타난 것들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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