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24

通達無我法者 2010. 12. 31. 21:2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수행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은 쉽게 해야 합니다. 

수행은 어렵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수행을 할 때 관찰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려야합니다.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느껴야합니다.

구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아야합니다.

억제하려고 하지 말고 풀어야합니다.


구속하려고 하지 말고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강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자세하게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아는 대로 알아차려야합니다.

대상을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서 있는 대상을 지켜봐야합니다.


수행은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해야 합니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해야 합니다.

부족하면 채워주고 많으면 빼야합니다.

무엇을 하거나 알맞게 해야 합니다.


또한 수행은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려야합니다.

단순하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본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것이라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수행을 하려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어나는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합니다.

대상이 왜 일어났는가?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때 대상이 지금 왜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이것을 다시 그대로 알아차려야합니다.


사유는 수행을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하므로

생각을 하지 말고 대상을 객관화시켜서 알아차려야합니다.

단순하게 알아차려야 명료해지고 직관으로 보게 되어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를 얻게 됩니다.


사람들은 괴로움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괴로움을 불러들이는 일만합니다.


괴로워서 화를 내는데도 계속 화를 낸다면

화를 내는 것이 좋아서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지한 상태로 죽었기 때문에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서 갈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이 생을 이어가며 계속되는 이유는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남이 가장 큰 괴로움이라는 것을 몰라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온갖 번뇌를 일으킵니다.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집착이 끊어져서 업을 생성하지 않아 윤회가 끊어져버립니다.


이를 위해서는 바라는 것 없이 알아차려야하며

없애려고 하지 않고 알아차려야합니다.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는 방법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상을 가지고 최상의 목표를 세워야하겠지만,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어떤 하려함도 없이 그냥 해야 합니다.


수행은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괴로움 때문에 일어난 그 순간의 몸과 마음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간의 방식이 아닌 출세간의 노력입니다.

이렇게 노력할 때만이 가장 숭고한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살아온 날들 동안 바라고 없애려고만 했었는데,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없앨 수 있었는지 돌이켜 보아야합니다.

바라면 바랄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되고,

없애려고 한만큼 더 화를 내게 되었습니다.


나타난 현상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것들은 지금 여기에 와서 보라고 법을 드러낸 것들입니다.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번뇌가 소멸되고 지고의 행복을 얻게 됩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무지한 100년보다

알아차리고 사는 행복한 단 하루가 더 좋습니다.

무지한채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100년보다

지혜를 가지고 고요하게 사는 단 하루가 더 좋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은 선업입니다.

이 선업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선과보가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려고 해도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선업의 과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선한 마음이고, 

이러한 수행을 하고자 하는 지혜는 선업의 공덕의 결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다는 사실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공덕을 쌓는 일입니다.

선업의 공덕은 수행을 증진시키는데 직접적인 원동력이 됩니다.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나 수행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진전을 하는데, 

결과적으로 도과를 얻는 것이나, 해탈을 향해 가는 그런 모든 것들이

선업의 공덕으로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되겠습니다.


선업과 악업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가 않습니다. 

선업은 선업 따로 작용하고, 악업은 악업 따로 작용을 합니다.

수행을 하려는 것은 선업이고 수행이 발전하는 것도 선업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악업이고

수행에 장애를 받는 것도 악업의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업의 정확한 적용범위는 부처님 외에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수행에 관한 것은 이미 경전의 모든 부분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괴로움을 겪는 것은 악업이고,

괴로움 끝에 수행을 하는 것은 선업의 적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으로 인해 더욱 불행해지거나 좌절하여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악업으로 인한 것에 또 다시 악업이 적용된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업의 적용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상당부분 업의 적용 범위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스승은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와서 수행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간에 지은 선업의 과보로 인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늘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단지 수행자의 기분을 좋게 하려는

의례적인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가 하는 수행을 좋은 것이라고 하는구나 라고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도 들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수행을 위해서 그토록 가혹한 고통이 있어야만 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수행은 괴로움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수행을 하도록 꼭 괴로움을 겪어야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선업과 불선업은 섞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은 선업의 과보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선심은 불선행을 하여 불선 과보를 받아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니까 선하지 못한 마음이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아서 괴로운 것입니다.


이때 괴로움을 겪는데, 이 괴로움 속에서 더 괴로움이 지속되느냐

아니면 과거에 행한 선업의 과보로 수행을 선택해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가 있습니다.


여기서 선업의 과보가 없는 사람은 괴로움을 겪고도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몰라 더 깊은 나락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거나 더 비참한 상황으로 스스로를 내몹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있는 순간에 선업을 쌓은 사람은 수행을 해서 새로운 선택을 합니다.


이때 저는 느꼈습니다.

자기가 겪는 괴로움은 자기가 일으킨 행위에 대한 과보로 받는 것이고

이때 내가 과거에 쌓은 선업의 과보가 있다면

‘아하 수행만이 살길이구나!’ 하고 수행을 선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업의 과보가 없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 고통을 해결하는 수행을 생각할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업의 과보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업의 과보로 수행을 시작해도

수행을 하는 중에도 지속적으로 선업의 과보를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더 큰 선업의 과보가 없으면 수행을 계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위빠사나 수행은 7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발전하는데

바로 선업이 없으면 이런 과정을 무사히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의 매 단계마다 축적된 성향이 수행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이때 수행자가 선업의 과보가 적어도 끈기 있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평등심의 지혜까지는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등의 지혜를 넘어서 도과의 지혜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지금 이전에 쌓은 바라밀 공덕의 과보가 없으면

결코 도에 이를 수가 없다라고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쌓은 선업의 공덕이 없을 때

그냥 그것을 한탄만하고 있어야 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에 쌓은 선업이 없더라도

지금 묵묵히 인내하면서 수행을 계속하면 됩니다.

지금 내가 힘든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새로운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이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없는 선업을 한탄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 알아차려서 새로운 선업을 쌓으면

그 선업이 지금 이후에 수행에 좋은 선과보를 남깁니다.


그래서 바른 마음가짐 없이 선업을 쌓지 않고 법을 얻고자 할 때

과연 법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자문해보십시오

욕망 하나로는 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능의 도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안중에 없이 오직 법을 얻고자한다면

이것은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수행을 해서 스스로 쌓는 공덕에다가

여러 가지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어쩌면 수행과 더불어 공덕을 쌓는 그런 모든 것들을 통 털어서

바르게 수행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범부는 세속의 즐거움이 한계에 와서 괴로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라야

비로소 도를 구할 마음을 냅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왔다고 해서 누구나 도를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업의 조건이 성숙된 사람만이 선과보에 의해서 도를 구합니다.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은 어느 때고 결코 섞이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괴로울 때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거나 또는 수행을 하는데,

이때 각기 선과 불선의 과보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되겠습니다.


괴로울 때 선과보가 많은 사람은 도를 구하여 지혜를 얻지만

불선의 과보가 많은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여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고통스런 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것은 불선행의 과보이지만

이때 수행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은 선행의 과보가 온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위를 하면 선 과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 나빠지지 않도록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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