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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연기와 위빠사나/25

通達無我法者 2011. 1. 1. 20:2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연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 방법이 첫째는 관용과 보시이며, 둘째는 지계,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셋째는 수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수행에 대한 것을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알아차림에 관한 것을 몇 회에 걸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차지하는 알아차림의 비중은 매우 큽니다.

어쩌면 알아차림 하나로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있다 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지혜는 모든 번뇌를 불태워서 열반을 성취하게 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다섯 가지 도의 항목인 정견 정사유 정정진 정념 정정을 실천해야합니다.

이중에 정념은 바른 알아차림으로 계율을 지키는 행위이므로 자연스럽게 정어 정업 정명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8정도의 계정혜 삼학이 여기에서 성립됩니다.

이러한 8정도의 계정혜가 바로 중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8정도 위빠사나 수행은 사성제인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중에서 도성제에 속합니다.

8정도는 인간의 지성을 나약하게 하는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도를 통해서, 정신의 발전을 퇴보시키는 탐욕을 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도성제를 통하여 괴로움과 불만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집착을 끊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열반을 성취하여 사성제를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의 길입니다.


사성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성자들만이 경험하는 진리라서 이것을 성스러운 진리라고 말합니다.

궁극의 목표인 최상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성자의 반열에 이르러야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 네 가지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집중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과정을 거치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괴로울 때는 먼저 괴로운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으로 와서 괴로운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콩닥거리는 느낌이나 거친 호흡을 주시해야합니다.


망상을 할 때에도 먼저 망상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리고 가슴으로 와서 망상한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느낌이나 호흡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심념처 입니다.


그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여러 가지 형태의 느낌을 가슴이나 머리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수념처입니다,


가슴이나 머리에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린 뒤에 다음 단계로 몸의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신념처 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대상을 통하여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는 것이 법념처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여섯 가지 대상이 부딪쳤을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청정이라고 말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할 때 어떤 대상이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에 개입을 하여,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냥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변화하기를 원하면서도 때로는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없이 아는 마음만 가지고 주시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모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성품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누구나 번뇌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도모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는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도록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죄가 없이 깨끗하고, 계행이 청정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는 마음이 제어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복잡한 일에 휩쓸리지 않고 평안을 얻게 되며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밖에 없다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며, 이러한 알아차림에 의해서만이 지고의 행복을 얻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입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게 현재에 붙잡아두고, 대상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여 대상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에 대하여 어떤 바람도 있어서는 안 되며, 대상의 흐름을 정지시키지 않고 계속해서 흐름을 주시해야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분석하려고 하지 말고,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일치시켜서 간단하고 명료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대상에 정확하게 겨냥하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해야 하고, 철저함과 가벼움이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알아차릴 때는 활을 쏠 때 과녁을 겨냥하듯이, 대상을 향해 처음부처 끝까지 마음을 떼지 말아야합니다.


대상을 겨냥하는 것은 대상을 주시하려는 의도를 내는 것이며,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치되면 정확하게 겨냥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대상에 보내서 알아차려야하며, 차츰 아는 힘이 생기면 육문이나 마음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육문에서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집중할 때는 현악기의 줄을 알맞게 조율하듯이 적절한 힘으로 해야 됩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알아차림이란 것은 해탈로 가는 표입니다.

수행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근기를 가지고 합니다.

저마다의 근기에 맞는 수행방편을 우리는 84000법문이라고 말합니다.

많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8400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이고, 다시 이것을 줄이면 8정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8정도를 줄이면 계정혜 삼학이고, 계정혜 삼학을 줄이면 오직 알아차림 하나라고 거듭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84000법문을 하나로 줄인 것이므로, 알아차림 하나만 있으면 84000법문을 관통하게 됩니다.

알아차림이란 표가 있으면 나고 죽음이 없는 기차를 타고 떠나며,

알아차림이란 표가 없으면 나고 죽음이 반복되는 공동묘지로 갑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이 있는 대상을 주시하는 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마음에 의도가 있어서 행위를 하고, 이런 행위가 업이라고 하며,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이 선업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 계율을 지키고 고요함과 지혜가 열려 이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선한 행위는 반드시 선한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조건이며 이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입니다.

알아차림이 없는 선하지 못한 행위는 불선업이며, 불선업은 반드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습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받아들여서 번뇌의 불을 끄므로, 먼저 자신이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움을 줍니다.

번뇌의 불을 끈 자는 자애가 일어나고 이 자애가 넘쳐 상대를 편안하게 하므로   자신과 남을 함께 돕게 됩니다.


알아차림은 바라고 없애려하지 않는 비작용적인 행위라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단순화시켜 번뇌를 무력하게 하고, 평등심이 생기게 하여 지혜가 나도록합니다.


알아차림은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 아니고, 단지 대상이 있어서 알아차리는 것일 뿐입니다.

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흙탕물을 없애려고 다시 흙탕물을 끼얹는 것과 같습니다.


알아차리는 것도 마음이 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데, 이 두 가지 중에 선택은 오직 자신의 마음이 합니다.


알아차림을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몸과 마음이 긴장을 푼 뒤에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해야합니다.

한번이라도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게 되면 두 번 세 번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바른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정화하게 겨냥한다는 것은 대상을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모아 오롯하게 대상에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대상에 보낼 때는 과녁을 향하듯이 정확하고 가볍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보낼 때는 지혜를 함께 보내야 하는데 지혜로 대상을 아는 것이 8정도의 정사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사유는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상에 마음을 보내 지혜로 아는 것을 정사유라고 말합니다.


잘하려고 하는 노력이 지나치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긴장을 하면 대상을 겨냥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나친 노력은 탐욕이라서 들뜨게 되므로 잘하려는 마음, 긴장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대상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며, 통증, 졸림, 망상, 선심, 불선심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릴 대상이 많아도 혼란을 느끼는데, 결코 혼란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나타난 것들은 모두 대상입니다.

대상이 아닌 게 없습니다.

어느 의미로 통증, 졸음, 망상, 가려움, 하기 싫음 이런 것들이 대상으로 나타났을 때는 알아차릴 대상이 많이 생겨서 수행자에게는 기쁨이라고 아셔야 됩니다.


대상이 많은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많다는 것은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릴 대상이 아무리 많아도 대상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같은 것으로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뒤따라야합니다.

노력 없이는 결코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먼저 선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노력에 의해서 알아차림이 있고 알아차림에 의해서 집중이 됩니다.

노력이 없이는 알아차림도 없고 집중력도 키울 수가 없습니다.

노력은 장애를 극복할 수 있고, 뿐더러 몸과 마음이 극한 상황이 될 때 버팀목이 되는 수단입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시작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알아차림을 통해서 법을 아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노력이 지나치면 들뜨게 되고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특별한 것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아니고, 긴장하지 않고 들뜨지 않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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