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27

通達無我法者 2011. 1. 2. 21:2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아차리면 몸이 좋아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바라는 것이 없이 제대로 했을 때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육신의 아픔은 일상적인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병든 우리의 마음입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만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할 줄 모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하는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이때도 우리는 아픈 몸만을 지켜볼 것이 아니고,

몸으로 인해서 아파하는 마음을 지켜보아야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불필요한 고생을 하고 스스로 병을 더 키우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바라는 것 없이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그 마음이 자유로운 마음이 됩니다.


몸이 있는 한 병을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죽음이 우리를 비켜갈 수가 없듯이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살 듯이, 몸은 병의 먹이이고 괴로움의 먹이입니다.

몸이 있는 한은 병이 있을 수밖에 없고 괴로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병과 늙음 괴로움은 몸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병은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단지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병이 나고 사리불 목련존자 또는 많은 아라한들도

병으로 고생을 한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 분들은 병이 나면 약을 드시고 다만 알아차렸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설사병으로 반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말은 인간과 병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 줄 알게 하는 극명한 사건입니다.


몸이 아플 때 몸만 아파야지, 마음까지 아프지 말아야합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몸이 아픈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바로 마음까지 아픕니다.

그래서 즉시 몸이 아픈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마음까지 아팠을 때는 늦게라도 마음까지 아픈 것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몸이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다면 그 아픔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커집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은 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병이 나면 업의 결과로 그냥 받아들여야합니다.


성자들이나 범부나 똑같이 병이 나는데,

성자는 업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병으로 인한 괴로움이나 원망이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구타나 모함 비난 박해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병으로 그치고, 또 업의 결과로 그치고,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부는 병이 나면 괴로워하고,

비난을 받으면 화를 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서 새로운 업을 만듭니다.

이것이 범부와 성자의 차이입니다.


알아차림은 비정상적인 환청과 환시를 바로 알아차리게 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많은 헛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처럼 잘못 알고 있습니다.

바로 헛것을 헛것으로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조작하거나 꾸미지 않고 적나라하게 알아차리게 합니다.


수행 중에 집중력이 향상되면서 알아차림이 뒤따르지 못하면

혼몽한 상태에서 없는 형상을 상상력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실재를 보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거나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갖습니다.


그런 현상 때문에 일생을 괴로움으로 보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면 나중에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헛것을 본 것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바른 알아차림이 부족한 현상입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균형입니다.

균형을 바로 잡아, 균형을 이루게 하여 안정감을 줍니다.

그래서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알아차림은 치우침이 없게 하여 중도를 뒷받침 합니다.

알아차림은 겉으로는 공격적이지만 실제로는 공격적이지 못합니다.

다만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앞서서 끌고 나가지 않고,

그냥 일어난 대상을 있는 순간에 알아차립니다.


겉으로는 적극적이어 보이지만

속내로는 지극히 방관자 적이고 수동적으로,

단지 대상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지켜보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에는 나름대로의 순도가 있습니다.

10%, 50% 90%... 여러 가지의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낮은 순도의 알아차림은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않아서 힘이 없는 알아차림입니다.

정확하게 밀착하고 알맞고 집중력이 있고 노력하는 마음이 포함될 때가

높은 순도의 알아차림이 됩니다.


우리가 수행이 잘 안된다고 할 때는 낮은 순도의 알아차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공손하게 모아서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알아차리면

높은 순도의 알아차림이 되어서 순탄한 수행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상에 깊고 깊지 않고 하는 것은 집중이라는 사마디의 문제가 있습니다.

순도가 높은 알아차림은 대상이 확대되어서 크고 자세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알았을 때 알아차림이 오래 지속되고 고요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혜가 납니다.


여러분! 수행을 하면서 너무 강하게 대상에 집중하면,

깊은 집중이 되어 오히려 고요함에 빠지게 됩니다.

만약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는 머리가 아프다거나 다른 장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못 본척하면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못 본척한다는 것은 흥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리해서

지켜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볍게 알아차려서 생기는 찰나 삼매를 얻게 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비로소 대상을 꿰뚫어 볼 수가 있습니다.

현재에 머물러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알아차림이 없는 것이고 ,

현재에 머물러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면

알아차림이 있는 바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할 때 알아차림에 집착하면 유연성이 없어서

오히려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할 일 없이 알아차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수행이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안 되듯이, 알아차림도 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는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너무 힘들여서 하거나 꼭 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 노동이 됩니다.

알아차림이 노동이 되면 마음이 힘들어서 싫어합니다.


일상의 알아차림은 노동을 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노동을 할 때도 일로 생각하지 않고 알아차리면서 하면

노동이 아니고 그 순간 수행으로 바뀝니다.


잘하려고 하는 것은 노력이 지나친 것인데, 노력이 지나치면 산란해지고 들뜨게 됩니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긴장되어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일을 할 때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알아차릴 대상으로 생각하고

몸의 느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단단함 부드러움 가벼움 무거움 따뜻함 차가움 움직임 등등을 알아차리면 

일도 재미있고 수행도 발전합니다.


힘들거나 싫어지거나 즐거울 때도 알아차리면

이내 일하고 있는 현재로 되돌아와 평형감각을 갖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 같은 일을 해도 피곤하지가 않아서 일석삼조의 이익이 있습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불을 피울 때 나무를 비벼서 피우는 것처럼

지속적이고 대상을 밀착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나무를 비비다 말다하면 불을 낼 수가 없습니다.

계속 비벼서 불을 내듯이, 알아차림에는 게으름이 없어야 합니다.

나태하면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태함을 무지라고 말합니다.


또한 망상도 깊은 무지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망상은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망상은 탐진치라는 악업의 세계입니다.

망상을 하고 사는 한 대상을 바로 알아차릴 수도 없으며,

어둠의 세계에 빠져서 사는 것입니다.

어두워서 빛이 없으면 끝없는 윤회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언제나 모든 번뇌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합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물위에 뜬공처럼 물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물 밖으로 튀어 오르지도 않고 항상 대상과 함께 있습니다.

수행자가 대상과 더불어 있을 때만이 대상에 함몰되지 않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현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물위에 있으면서 물의 흐름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더불어 있으면서 현재 상황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알아차림의 임무입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는 출렁거리는 것을 알고,

고요히 머물 때는 고요히 머무는 것을 알면 됩니다. 


알아차림은 그냥 알고 말아야지,

알고 난 뒤에 무엇인가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단지 대상을 아는 것 외에 어떤 조건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알아차림은 단지 알고 말아야합니다.

알고 난 뒤에 어떻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결과를 얻으려 하지만,

훌륭한 결과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게 살며시 옵니다.

그것은 바라지 않고 알아차렸을 때만이 오는 결과입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은 언제나 대상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모양이라는 대상의 중앙에 고리를 단단히 걸어서 떨어지지 않게 하고,

다음에는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서 그 대상의 성품을 보아야합니다.


수행자가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먼저 모양이라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모양이라도 붙잡고 있을 때 차츰 그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이제는 성품을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오직 욕망의 힘으로 앞으로 굴러갑니다.

이 욕망의 전차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끝도 없는 무한궤도를 질주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이 전차의 브레이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끝없는 우주의 끝없는 삶을 떠돌아야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고통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났든지 그것은 반드시 고통과 죽음이 함께 수반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알아차리지 않고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알아차림은 대상을 정확히 겨냥하는 과녁처럼

항상 분명한 표적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방황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의 대상을 주시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알아차림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비상식적인 것은 거칠고 혼란스럽고 자연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비상식적이지 않고

상식이 통하는 매우 자연스런 것이므로 인위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알아차림에는 억지가 없습니다.

억지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스스로 되어진다는 것으로

대상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좋은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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