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29

通達無我法者 2011. 1. 2. 21:5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미워하고 좋아하지 마십시오.


바라는 것이 많으면 상대를 미워합니다.

서로에게 고통이므로 미워하지 마십시오.

미울 때는 미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그 마음의 뿌리가 갈애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많으면 상대를 좋아 합니다.

서로에게 고통이므로 좋아하지 마십시오.

좋을 때는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좋아하는 마음의 뿌리가 무지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지혜가 나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알아차림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고 생각에 빠집니다.

그러면 퇴보 합니다 .

알아차림으로 인해 지혜가 난 것을 기뻐하지 말고

다시 기뻐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의 갈 길은 멉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사실은 더 중요 합니다.

지혜가 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혜를 좋아해서 집착하기 때문에 수행이 퇴보 합니다 .


제가 언젠가 미얀마에서 귀국을 할 때

저희 스승께 인사를 드리면서 몇 가지 질문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알아차림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스승에 눈빛은 잘하고 있다는 자애가 살며시 보였습니다.


저의 스승은 평소에 상대를 잘 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눈을 바닥에 깔고 늘 이야기를 들으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스승을 바라보면서 스승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그 이익이 크고 효과가 컸다라고 말씀을 드리니까

스승께서는 자애로운 미소를 띠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제 질문이 계속 되었습니다

제가 그 알아차림이 자꾸 끊어지는 것에 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또 제가 지금 귀국을 하는데

“한국에 가서 어떻게 이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질문 드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수행은 스승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특별한 묘수가 있어서 그 방법을 스승은 알고 있는 것처럼 다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저의 이러한 질문에 스승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알아차리는 것을 너무 집착 하고 있다.

알아차리다가 끊어졌으면 끊어진 것을 알아차리면 되지

너는 왜 알아차림을 지속 시키려고 하는 집착을 하고 있느냐?

알아차림은 끊어지는 것이다.

끊어졌을 때는 끊어진 것을 알고 다시 알아차리면 된다.

그런데 너는 지나친 집중을 얻으려고 지금 하고 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말이 너무 뜻밖이어서 저는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거나 또 한국에 와서 스승께 경건한 마음으로 항상 감사를 드렸습니다.

집중이 최고로 좋은 것이고 알아차림을 지속 하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좋은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스승은 오히려

“지금 왜 알아차림이 끊어진 것을 문제로 삼느냐”라고

말씀 하신 것을 어디서 누구에게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알아차림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 한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을 집착하지마란 말씀에 할 말을 제가 잃었던 것입니다.


스승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고 계실 것 같은 기대가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큰 스승이 알고 있는 특별한 방법이었습니다. 

바꾸어 이야기 하면 저는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묘안을 얻으려고 했는데,

스승은 알아차림을 지속 하려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단순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항상 자신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 스승께서는 저를 한번 힐끗 보셨는데,

그 눈에는 지혜의 날카로움과 따뜻함이 함께 있었습니다.

스승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고 세삼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물러나와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내 스승의 말씀을 곱씹으면서 수행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스승의 한 마디가 제 수행에 매우 좋은 지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힘이 있는 만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인 것은 문제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 합니다.

무엇도 문제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내가 지금 문제라고 하고 있네!”라고

알아차리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부처님께서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위빠사나의 사념처 수행이란 바로 알아차림으로 구슬을 꿰는 것이고

벽돌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이란 뗏목을 타고 피안으로 강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알아차림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함께 하는 모든 대상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현재 자기가 마주 하는 대상에 가볍게 떠나가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

공을 물에 놓으면 빠지지도 않고 물위로 솟지도 않는다.

알아차림은 이렇게 대상에 빠지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게 자기 대상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대상을 잊어버리지 않고 향하게 하고 보호함으로써 지혜가 드러난다.

알아차림은 튼튼한 기억인 상과 가깝다.

비유를 들면 튼튼한 기둥이 있는 성문처럼 육근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알아차림은 문지기와 같다고 한다.

이렇게 주석서에서는 알아차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일상의 알아차림이 강화되면 다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알아차림으로는 부족하여 분명한 앎이 함께 작용 되어야 하듯이 알아차리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뒤따를 때만이 온전한 알아차림이 유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사념처안에 심념처라는 마음은

마음을 사용해서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뜻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몸을 알아차리고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리고 알아차리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단계가 와야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경우는 많지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 하는 것이고, 이 알아차리는 마음이 다시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완전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가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인 느낌 생각 행동을 일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을 느낀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말 합니다. 
  

감각적 쾌락의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감각적 쾌락을 일으킨 것은 마음이므로

그 느낌을 통해서 그것을 일으킨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 반드시 그것을 일으킨 것이

탐심이 아니면 진심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런 원인을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차츰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또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각을 한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을 했을 때 망상한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다음에 다시 한번 망상 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면 좋건 싫건 간에 모두 집착으로 망상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도 좋아서 집착으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스스로의 무지를 알게 됩니다. 
  

다음으로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행위는 마음이 시켜서 합니다.

마음이 시키지 않고, 자신이 좋아서 하지 않으면, 절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눈꺼풀 하나도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눈꺼풀을 움직이지 않으면 갑갑해서 마음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는 것이라서

이렇게 모든 것들을 시키는 것을 우리가 일일이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한순간 한 찰나 간에 커테떼떼인의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음은 매순간 무한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이 거듭되는 것을 말 합니다. 
  

몸은 통나무와 같이 스스로 앉거나 일어나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행동을 보고 행동을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때 행동을 보고 마음을 아는 방법이 바로 행동을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있는 마음을 알고, 일어난 마음을 알고,
하려는 마음을 알고,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알아차리면 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야 원인을 알게 되어 점진적으로 악습의 뿌리가 근절 됩니다.

악습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는 선업의 습관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악습은 알아차림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선업의 마음이 알아차림이 있을 때도 선업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선업이라고 알고 거기에 빠져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념처경에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알아차림은 많은 이익을 줍니다.


알아차림은 7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마음의 청정

둘째 슬픔의 극복

셋째 비탄의 극복

넷째 육체적인 고통의 소멸

다섯 번째 정신적인 고뇌의 소멸

여섯 번째 올바른 길 팔정도에 도달함

일곱 번째 열반을 성취함

이렇게 알아차림의 이익은 매우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알아차려야 되겠습니까?

알아차림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번뇌가 있지만 번뇌가 있는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저마다 축적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축적된 성향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축적된 성향을 바꿀 수가 없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축적된 성향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바뀔 수 없는 성향을 바꾸려고 해서 번뇌가 생깁니다.

바뀌지 않는 성향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의 축적된 성향을 바꾸려고 해도 과도하게 개입하면

오히려 성향을 더 강화 하는 결과만 맞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성인도 단 한사람의 성향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부처님 역시도 마찬가지 이십니다.

부처님도 단 한분의 성향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다만 길을 안내해서 스스로 바꾸도록 했을 뿐입니다. 
  

상대의 축적된 성향을 존중해 줬을 때만이

자신의 축적된 성향도 용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축적된 성향은 바뀌지 않지만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원인과 결과가 사라지게 되어 언젠가 그 축적된 성향은 소멸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이 순간에 우리가 알아차려야 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이 알아차림만이 우리가 피안으로 가는 뗏목을 타는 것이 됩니다.

이 알아차림만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우리가 아셔야 되겠습니다.

오늘도 알아차림과 함께 여러분들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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