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28

通達無我法者 2011. 1. 2. 21:4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습관을 바꾸고 욕망의 거친 물결을 건너게 해줍니다.


알아차림은 불안 초조 공포로부터 자유를 줍니다.

알아차림은 들뜨지 않고, 고요함이 생기게 하여 그 순간 긴장으로부터 이완되게 합니다.

그래서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유연해집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내적 고요함의 상태를 말합니다.


알아차림은 작용하지 않고 비 작용적인데,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대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단지 대상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뿐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수가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냉정해지거나 차가워진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냉정해진 모습에 대해서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족이나 주위로부터 변했다는 말을 듣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변화입니다.

누구나 수많은 날들 동안 이일저일 가리지 않고 참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할 일인지 할 말인지 알 것도 없고 그냥 분별도 없이 살다가

이제 대상을 알아차리면서부터 보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감정의 지배를 받고 살다가 이제는 이성적인 힘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거쳐 참된 자비가 넘쳐흐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의 여과를 거쳐야 비로소 바라는 것 없는, 

온전한 자애가 생겨서 더 따뜻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냉정한 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과정을 거쳐서 따뜻한 자애가 생기는 시기가 반드시 옵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화해서 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의식이 진일보해 간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냉정해졌거나 이성적인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에 의해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수행을 해서 냉정해진 것이 아니라 전에 없던 새로운 의식의 개안(開眼)입니다.

새로운 의식이 계발 된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이때는 냉정해진 자신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 마지막 상황을 다시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래서 끝이 없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 다시 시작입니다.

그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엇을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리기만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의미가 없는 것인 줄 압니다.

이 진정한 뜻을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바른 지도를 받아야 단지 알아차리고 마는 수행을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나 간에 모든 삶은 과정입니다.

과정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냉정해졌다고 느끼게 된 것도 과정입니다.

마음이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순간이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정되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나 두려움을 가질 것이 없습니다.

두려운 상황도 그때 그 순간의 마음일 뿐입니다.

좋은 일에 있어서나 나쁜 일에 있어서나 과정이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결론을 내리고 시시비비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상황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아야합니다. 

그런 과정을 경험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지 않는 자신을 알고 스스로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당장에 어떤 변화나 결과를 기대하지 말아야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 수행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변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변해가는 과정을 스스로 잘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온전하게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사실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알아야하는 대상이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에 남을 의식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내가 세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세상은 나의 인식의 범주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끌어들이지 않는 한 세상은 나와 무관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항상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차림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면

자연히 밖으로 향해지는 마음이 생겨서 따뜻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해서도 자애로움을 갖습니다.


내 마음이 편해야 세상도 아름답게 보이고 남에게도 관용과 자애가 생깁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나 스스로의 문제가 우선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나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수행자가 의식이 고양되어서 수행이 발전된다는 것은 지혜가 성숙된 것인데

이 지혜는 알아차림의 결과로서만이 나타난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각기 다른 지혜가 있겠지만,

결국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하고 있지 않는가 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발전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스승님들은 항상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고 계셔서

번뇌가 침입할 틈을 주지 않는 행동을 하시면서 사십니다.

그래서 그 모습은 참으로 경건하고 소박하고 아름답습니다.


수행자는 우선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 다음으로 알아차림을 얼마나 지속시키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따르는 것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과 함께 항상 분명한 앎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알아차림의 확실성, 정확성, 지속성은 분명한 앎이 수반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대상에 대한 이로움, 적절함, 분명한 대상,

무지가 없는 앎인가를 확인해야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겨냥하고, 대상이 겨냥이 되지 않을 때는

무엇이 이익인지, 무엇이 손실인지, 시기와 상황을 알아야 되고,

또 내가 불필요한 대상을 가지고 고뇌하는지,

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에서 바른 법을 보는지,

이렇게 아는 것이 분명한 앎입니다.


여러분들!

알아차림이 안 될 때는 무엇이 이익인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때와 장소를 보십시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

그래서 알아차림이 부족할 때는 이러한 분명한 앎이 함께 할 때 알아차림이 발전합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상호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새가 두 개의 날개로 나르듯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상호 의존적이고,

알아차림의 기본적인 구성 요건입니다.

이것은 상승효과의 작용으로,

하나보다 둘일 때가 뛰어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수행이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위빠사나에서는 열반을 주장하므로 불사의 문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불사의 문이란 태어나지 않는, 윤회가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태어나지 않고 윤회가 끝나는 불사의 문은

8정도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알아차림은 영원히 사는 죽음이 없는 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표를 잃어버리면 계속 나고 죽는 공동묘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경전에 보면 죽기 전에 알아차림을 통해서 아라한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알아차림을 통해서 지혜가 성숙되고,

집착이 끊어진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여기서도 죽기 전의 상태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하는데,

평소에 알아차림이 있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고,

실제로 죽을 때도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죽을 때는 죽을 때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몰심이라고 합니다.

이 죽을 때의 마음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됩니다.

이 인간의 일생을 결정하는 마음이 바로 사몰심입니다.


죽을 때의 그 순간의 마음은 이미 끝났지만,

그 마음에 담긴 과보가 다음 생에 재생연결식으로 전해져서 다음 생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죽을 때의 마음은 이미 끝났지만,

다음 생에 태어나는 과보를 남기고 끝나기 때문에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뒤에 끝난 마음이기 때문에 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과보가 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하면

수행은 어떻게 죽느냐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했을 때

죽을 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의 마음이 전혀 먹어보지 않은 마음을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상시의 마음이 죽을 때의 마음으로 그 과보가 지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죽기 전의 마음의 상태가 고스란히 다음 생으로 가기 때문에

죽기 전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가 문제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알아차림만이 다음 생을 결정하고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혼미하게 죽지 않고 죽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알아차리며 죽으면

최고의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해보지 않던 알아차림을 죽기 전에 갑자기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의 필요성은 새삼 더 거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할 때도 정도가 있습니다.

무엇이나 능력만큼 해야 합니다.

없는 힘을 내서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알아차림이 부족하다고 한탄할 것 없습니다.

알아차림이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아무리 중요해도 알아차림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알아차림을 집착하는 것이 또 다른 욕망이므로

알아차림을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수행자에게 필요합니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진행형이어야 됩니다.

언제나 알아차릴 대상은 계속됩니다.

결론을 내리면 그 순간 알아차림이 박제되어버립니다.

결론을 내리면 그 순간 알아차림이 없어지고 사유로 빠집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최종 상황을 또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괴로울 때 괴로움에 빠져서 괴롭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괴로워하고 있네!’ 라고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려야합니다.

언제나 어떻다고 결론을 내렸을 때도 결론을 내린 그 사실을 다시 알아차려야합니다.


모든 대상은 정체하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흐름 안에서 알아차림을 통해서

나라는 유신견이 자리 잡을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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