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31

通達無我法者 2011. 1. 3. 23:2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은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이들을 존경하기에 앞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한 날이 행복한 날입니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나쁜 일을 한 날이 불행한 날입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행복을 방해 합니까?

지금 누가 여러분의 행복을 빼앗습니까?

여러분들의 행복을 방해하고 빼앗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탐욕과 성냄과 무지가 행복을 가로 막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직 자신의 마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제 행복은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은 조건일 뿐입니다.

그 조건을 만든 것도 자신이며,

그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것도 오직 자신뿐입니다.

 

이런 상황이 어떤 경우에 남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자신의 운명이나 행복과 불행을 결정 합니다.


여러분!

행복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행복은 한 순간의 자기의 마음으로 결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순간의 마음이 어디서 갑자기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준비하고 실행하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옵니다.

그래서 행복은 굴러 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만들어서 얻는 것입니다.


행복은 물질적인 조건과는 무관 합니다.

물질이 행복일수도 있지만 세속의 기초적인 즐거움일 뿐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감각적 욕망을 뛰어넘는 이욕에서 나옵니다. 

감각적 욕망은 느낌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안다는 것은 모두 느낌으로 압니다.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밖에 있는 대상인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과 만나서 접촉할 때 마다

반드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육문에 육경이 부딪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육문과 육경을 12처라고 말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 대상에 부딪쳐서

인식되는 것을 말 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두 이 12처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체라고 말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를 알았다, 세계를 알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귀결 됩니다.


행복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떤 상태에 두느냐 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결정이 됩니다.


12처가 부딪쳐서 일어나는 이 느낌이

갈애를 일으켜서 욕망으로 발전하여 집착을 하게 합니다.

바로 이 괴로움은 집착으로부터 옵니다.

 

이 집착이 습관으로 바뀌면 몸과 마음이 병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과 차츰 멀어집니다.

그리고 잘못된 쾌락을 행복으로 알게 되어 더욱 그것을 추구 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을 앗아가는 단초는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는데 있습니다.


느낌은 수행의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이 느낌은 오직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가장 유일한 실재입니다.

그래서 느낌을 제어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돈도 느낌입니다.

명예도 느낌입니다.

술도 담배도 느낌입니다.

도박도 짜릿한 승부의 느낌 입니다.

느낌은 더 좋은 느낌을 추구 합니다.


사실 도둑질도 느낌입니다.

불선의 느낌이 습관이 되면

선업의 느낌보다 훨씬 맛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더 빠지게 됩니다.

 

느낌은 한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데,

우리는 한 순간의 느낌을 위해서 평생의 목숨을 거는 대 도박을 합니다.

또한 한 순간의 느낌일 뿐인데

항상 그것을 알면서도 느낌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이러한 느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항상 우리는 현재로 와야 됩니다.

현재를 아는 것이 바로 느낌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렇게 수행은 하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감각적 욕망이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재 하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자그마한 틈만 보여도

우리는 상당한 발전을 꽤할 수가 있습니다.


‘아 ! 지금 이런 느낌이 일어났네!’

또는 ‘아 ! 지금 이런 느낌이 있네!’ 라고

그 순간의 느낌을 알기만 해도 대단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수행을 시작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의 충동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이렇게 알아차리게 되면 

느낌이 일어난 뒤에 행동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차츰 더디어 질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대단한 발전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결코 없애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없애려고 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으면 결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억제 되어서 해결 된 것 같지만

사실은 잠재의식 속에서 더 크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억제하는 방법으로는 문제를 더 키울 뿐이지

영원히 해결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작용에 대한 반작용의 물리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냥 바라는 것 없이, 없애려는 것 없이 알아차리면

비작용으로서 전혀 반대급부의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냥 조건 없이 알아차리는 이것만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지껏 살아온 방법이 고치려 하고,

억제하고, 후회하고, 질타한 것뿐이었는데,

과연 그런 방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습니까?


오히려 상황은 늘 더 나빠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같은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 될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대상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서 알아차리고 마는 것입니다

현재로 와서 알아차리면 모든 것이 견딜만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가는 순간부터 번뇌는 시작됩니다.


어느 날 천인이 부처님께 와서 숲 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얼굴색이 평온하게 보이는지를 물었습니다.


"숲 속에서 그들의 평온한 안식처를 만드는 자들

거룩한 삶을 사는 성스러운 자들

한 끼의 식사로 허기를 메우는 자들

어떻게 그들의 얼굴이 평온한지 말씀해주십시오." 라고

천인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천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지나간 일을 한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직 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지탱해 나간다.

그러므로 그들의 얼굴색이 평온하게 보인다."


수행자들은 현재에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주시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현재에 있게 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몸이나 마음이란 대상을 선택하여

머물러서 지켜보는 것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과거로 가면 아쉬움과 회한 후회 등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은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비생산적인 일 일뿐더러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오지 않는 미래는 온통 기대치로 가득 차서 욕망이 불타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기대했던 만큼 좌절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 근심 걱정이 없어집니다.

단 어떤 특정한 대상을 주시 하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이것을 알아차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이란 현생에 행복이 있고,

다음 생에 내생의 행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생의 행복은 살아있으면서 얻는 행복입니다

 

이 현생의 행복은 네 가지의 조건에 의해서 성립이 됩니다.

첫째 노력하는 것입니다.

둘째 신중하고 방심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셋째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넷째 올바른 생계 수단을 갖는 것입니다.

 

올바른 생계수단은 바른 직업을 갖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을 말 합니다

그리고 수입은 저축과 비상금 생계비 등으로 분배해서

사용 하는 것을 말 합니다.


다음에 내생의 행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생의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내생의 행복을 얻는 것은 열반을 말 합니다

열반을 지고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네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생의 행복을 위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셋째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토록 우리는 현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경전에 있는 행복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

한 때 거룩한 스승께서 사왓띠에 제타 숲에 있는

아나타 삔띠까 장자의 동산에 계셨습니다.

 

그때 용모가 단정한 천인이 밤중이 지나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며 스승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한 후에 한 쪽에 서서 게송으로 여쭈었습니다.


“많은 천인과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을 바라면서 행복하고 있습니다.

최상의 행복을 말씀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자기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올바르게 생활 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지식과 기술과 훈련을 쌓고 절제하며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안정된 직업이 있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항상 겸손하고 온순하며,

매사에 만족감과 감사할 줄 알고.

적절할 때 설법을 듣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를 만나는 것,

적절할 때 법에 대해 담론하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수행을 하고 청정하게 살며

사성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실천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음이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지 실패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번영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이것이야 말로 더 없는 행복이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은 누가 줍니까?

행복을 가로 막는 자는 남이 아니고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고 스스로가 만듭니다.

 

세속의 행복은 감각적 쾌락이고

수행자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행복한 자는 행복을 구하지 않고

단지 알아차리는 것으로 행복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행복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 합니다 .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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