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51

通達無我法者 2011. 1. 7. 00:3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은 무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인

지혜를 얻는 마지막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혜를 바른 견해, 바른 사유라고 말하는,

계정혜 중에서 혜에 속합니다.

 

8정도의 혜(慧)는 정견과 정사유를 말합니다.

정견(正見)은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고,

정사유(正思惟)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지혜를 나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말씀하신

바른 견해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주시하는 수행자는

그것의 진정한 성품을 알게 됩니다.

 

이때 진정한 성품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본성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팔과 다리를 구부리면서 주의를 집중하면,

단단함과 움직임의 깨달음의 요소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람의 요소입니다.

 

이 바람의 요소에 대한 바른 견해가 생기는 것을

정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알아차림이 없으면 이것은 손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라고

관념이나 모양으로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수행자만이 손의 따뜻함이다, 진동이다, 단단함을 느껴서

실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이 손을 나의 손이라고 본다면, 이것을 손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관념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손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이 손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거움과 단단함, 부드러움과 딱딱함, 따뜻함이라고 느낄 때,

손이 가지고 있는 실재를 느낄 때만이, 이것이 바른 견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인 열이나 통증, 또는 정신적 행위인 상상이나 의도에 대한

바른 견해에 대해서도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집중해서 고요해지면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이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보입니다.

 

이러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무상이며,

이러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통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속성인 괴로움을 볼 수가 있으며,

그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될 수가 없을 때 비로소 무아라는 자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통찰지가 바로 바른 견해입니다.


여러분, 바른 견해란 바른 사유와 기타 도(道)에 관련된 법을 뜻합니다.

도에 대한 위빠사나의 통찰지혜는 알아차리는 매순간에 일어납니다.

 

존재하는 것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완전한 통찰지를 얻으면

수행자는 그 결과로 열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라면

수행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존재하는 것의 세 가지 특성이라는

삼특상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존재하는 것의 세 가지 특성, 또는 세 가지 속성,

삼특상을 아는 것이 바로 바른 견해입니다.

이 삼특상은 오온과 모든 유위법의 보편적 속성을,

통찰지혜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철견되어야만 합니다.


그 중 존재하는 것 중의 첫 번째 특성인 무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상은 덧없음 또는 항상하지 않음이라는 뜻으로,

모든 유위법이 변하며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무상을 알기 전에는 항상한다고 알았습니다.

그것을 아트만이라고도 말합니다.

 

절대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

어떤 초월적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항상한다라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항상하는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통찰지혜 수행을 통해서 보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그러니까 무상의 반대는 항상하다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무상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어서 말씀드리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변한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바꿔 얘기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것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하는 것이 없는 무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불교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로서만이 철견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무상을 알면 다음에는 존재하는 것들의 속성인 괴로움을 압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괴로움은 두(du)와 카(kha)의 합성어인 빨리어 둑카(dukkha)의 뜻입니다.

 

실제 둑카는 고(苦)라고 말씀드리기 보다는 불만족입니다.

그리고 하찮은 것, 별 볼일 없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것을 한문으로 고(苦)라고 할 뿐이지,

실제의 뜻은 불만족이고, 하찮은 것,

그리고 비어있는 것,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별 볼일 없는 것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르기 때문에 크게 생각해서 문제를 삼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것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일 뿐이고

업자성정견에 의해서 자기가 지은대로 받는 것이라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는 불만스러움, 괴로움, 고통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모든 윤회하는 존재계의 보편적 특성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러 고(苦)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괴로움에 처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의 끈끈한 덫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무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아는 항상하는 자아가 없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령 내가 있다면, 내 몸이 나의 소유라면

내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어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마지막 호흡이 끝날 때에도 내 마음이 있다면,

몸이 나의 소유라면 호흡을 더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마음만 있고, 단지 몸만 있기 때문에,

단지 조건에 의한 마음만 있고, 단지 조건에 의한 몸만 있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의도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도 아니라서

거기에 자아가 없다는 뜻으로 무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뜻으로

우리는 무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빨리어 경전의 도처에서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를 설하셨습니다.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의 무상, 고, 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나며,

오온으로 대표되는 모든 개념적 존재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체해서 드러내는

유위법이 무상, 고, 무아임을 철견할 때, 해탈의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라는 것이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라고 이해하셔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상, 고, 무아를 알기 위해서는 통찰지혜를 가져야 되는데,

이 통찰지혜라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라는 사실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here, 현재, 그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 여기 있는 정신과 물질,

이 순간의 몸과 마음 안에 지혜가 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수행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라고 말하는 것이 빨리어 경전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이를 중국에서는 이현법중 또는 현금으로 옮겼고

직역을 하면 ‘보여진 현상에서’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금 여기’ 라고 의역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 라는 말이 ‘here and now’ 라고 영어로 말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지금 여기에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과거로, 미래로 관심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불교수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은

바로 지금 여기라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이 되는 근본도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 근본도라는 것은

업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선행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업자성정견의 지혜가 바로 근본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업은 자기가 지은대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근본도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반의 증득을 바라보며

보시와 지계 등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열반으로 가는 근본도는 바로 업자성정견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다음 단계의 도는 예비단계의 도입니다.


이 예비단계의 도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왜 예비단계의 도인가 하면 반드시 열반이라는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위빠사나의 예비단계의 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으로 가는 도는 근본도, 예비단계의 도,

이 두 가지의 도의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 성스러운 도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성스러운 도가 바로 성자들이 이른 열반의 도입니다.


특히 수행자는 성스러운 도를 열망하고,

소중히 하고, 받아들여할 법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위빠사나 수행에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수행자는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의 도를 고귀한 법으로 받아들여서 그 수행법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반에 이르는 도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래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위빠사나 수행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가르침과 수행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방법에 집착하여 바른 수행법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모두 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른 도를 알지 못하고 오해를 합니다.


보시, 지계, 수행이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바로 무명이며,

보시 등의 선한 행위가 자신의 이익을 해친다고 잘못 아는 것도 무명입니다.

더욱 해로운 무명은 바른 명상수행법에 대한 무지와 환상입니다.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 불교의 도그마가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 불교의 독단적 교리가 결코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도과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예비단계의 도입니다.

이 예비단계의 도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열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바른 도에 대한 무지는 가장 끔찍한 무지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명에 휘둘리는 사람은 선한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여

잘못된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시, 지계, 수행을 해야 할 필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오늘 알았습니다.

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혜를 얻는 것이고,

 

그 지혜를 얻는 것은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 함께, 모두 이 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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