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52

通達無我法者 2011. 1. 7. 01:0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을 말씀드렸고,

그리고 그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라는 것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무명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96쪽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96쪽의 위에서부터 4 번째 줄에 있는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일어난다.’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일어납니다.

무명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행위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무명의 상태에 따라서 일어나는 행도 다릅니다.


어쨌거나 연기가 회전할 때는 무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명으로 시작해서 무명의 상태에 따른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행이 일어난다’입니다.


이때 행은 업의 형성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과거에 이루어진 업의 형성력,

마음의 의도, 신, 구, 의, 삼업 그런 것들을 통틀어서

행(行)이라고 말합니다.


자! 보시뿐만 아니라 계율을 지키는 것 역시

천인이나 범천으로 태어나는 등

내생에서 보다 나은 지위로 태어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지곤 합니다.

이것이 무명으로 인하여 선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마음으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악한 행위를 하면 바로 불 선업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무명으로 인하여 불 선업이 일어남을 말합니다.


여러분! 계율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한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한다면 탐욕이 있는 것이라서 이것이 무명으로 한 행이 됩니다.


그러나 바른 일을 하고도 바른 일을 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선한 마음으로 한 것이라서 선한 행이 됩니다.


이렇듯이 무명의 상태에 따라서 행이 이루어지고

지혜의 상태에 따라서 행이 이루어집니다.


이때의 무명은 연기이고 행은 연생입니다.

무명이 원인이 되어서 행이 일어날 때 그 행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무명과 행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원인입니다.


무명은 무명으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원인을 일으켜서 결과인 행을 만들게 합니다.

이것이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입니다.


보통 보시를 한 후에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말을 합니다.

이 기원이 이루어져서 그 기원을 바란 사람이 천인이나 범천이 된다고 해도

다음 생에는 바로 고통뿐인 태어남이 있을 뿐이지 결코 윤회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면

무명을 원인으로 선업이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선업은 완전한 선업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오직 괴로움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이 행복의 원천이고,

정신과 물질이 소멸한 열반은 탐스럽지 못하며,

열반에 이르는 길은 험하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몸으로 하는 세 가지 행위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 중에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할 것이며

어떤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생의 행복을 바라고 보시를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남을 속이고 강도짓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행위이면서 이것을 업이라고 말합니다.

이 업의 동의어를 행이라고 말합니다.


행은 세 가지 종류인데 생각으로 짓는 행, 말로 짓는 행, 몸으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은 의도를 전제로 합니다.

의도의 기능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내고, 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써

모든 행위의 주요 동기가 됩니다.


의도는 살생이나 보시 등, 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통해서 의도의 본성을 경험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12연기에서 무명도 마음이고 행도 마음입니다.

실제 우리가 몸으로 짓는 행이 있지만, 그것을 물질로 보지 않고,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행을 마음의 형성력, 마음의 작용으로 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행에는 선업의 과보를 낳는 공덕이 되는 행과

악업의 과보를 낳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움직임이 없다는 뜻에서 부동행(不動行)이라는,

무색계 선정에 있는 흔들림이 없는 행이 있습니다.


색계선과 욕계에서 업보를 받는 욕계선을

모두 공덕이 되는 행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공덕이라는 말을 빨리어로는 뿐냐라고 하는데

이 말은 깨끗이 하는 것, 또는 정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 이 정화, 깨끗이 라는 것은 비누로 몸에 있는 때를 씻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보시, 지계, 수행을 통해서 업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행은 현생과 내생의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공덕의 또 다른 의미는 선행을 한 사람이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경향입니다.

여기서 선행이라는 것은 건강, 장수, 부귀 등 다양한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열반에 대한 소원으로 선행을 행하였다면,

이 선행으로 인해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삶으로 가거나,

마지막 생에 이르기 전까지의 행복과 잘 살 수 있는 보장을 받습니다.


업은 지음을 실행하는 것으로서, 행복을 얻기 위해 무언가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선하거나 불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되는 공덕 행은 선업의 과보를 가져오는 선행입니다.


욕계 선행은 여덟 가지가 있고 색계 선행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선행은 보시, 지계, 수행의 세 가지 요소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은 업의 과보가 대단히 큰 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보시자는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동안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에

함께 다 모두 기뻐해야 합니다.

경전에 의하면 이러한 보시는 매우 좋은 업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시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보시는,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동안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에

모두 기쁠 때만이 완전한 보시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으로 보시를 한다면,

바람 때문에 그것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보시를 한 뒤에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보시를 하고 괴로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할 때나, 보시를 하고 나서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보시만이 완전한 보시가 될 것입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평정의 상태일지라도

보시자의 마음이 깨끗하다면 이 보시행은 매우 큰 업의 효력을 지닙니다.


업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보시행은 합리적인 것으로,

탐욕과 성냄, 무지의 축적된 성향 없이 재생의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도덕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이나 업의 과보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없는 보시행도

선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지혜가 결여된 보시입니다.


이런 보시는 살아가면서 보시행에 대한 선한 과보를 받겠지만,

다음 생에 도를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지는 못합니다.


자기가 베풀 때에 바람이 없는 공덕 행을 할 때만이

그 선한 과보의 영향으로 다음 생에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태어남이 지혜가 있을 때만이 가장 고귀한 태어남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목표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윤회를 끊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없는 보시를 할 때만이 가장 수승한 지혜로 태어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선한 행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두 종류의 선한 행위 중에 자발적으로 한 선한 행위가 더 큰 과보를 받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선한 행위 네 가지를 마지막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여덟 가지 욕계의 선한 마음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이들 선법중의 하나에 의해 유발되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집중과 명상을 할 때 우리는 이런 여덟 가지 선법을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만약 선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한다면,

수행자가 삼매를 잘 계발하면 색계 선정을 얻습니다.


선이란 대상에 오롯이 집중된 마음인 심일경성을 말합니다.

사마타 선정은 순일하게 고요한 상태를 얻기 위해 집중을 합니다.

그러나 선정 삼매는 바람이 불지 않는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같습니다.


경전에 의하면 색계 선정에는 네 가지가 있고,

아비담마에서는 색계 선정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선(禪)이라고 번역되는 말은 쟈나라는 것인데

이것을 중국에서는 선나로 음역되고,

다시 우리는 선(禪)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대상을 명상하기 때문에, 혹은 반대되는 것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선(禪)이라고 한다.’

라고 선(禪)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반대되는 것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섯 가지 장애인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게으름과 혼침, 들뜸과 후회, 의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정은 사마타 수행으로 얻어집니다.

이런 수행은 삼매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을 한 가지 선택된 대상에 고착시킴으로써 모든 정신적인 혼란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장애는 억압되고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몰입됩니다.

경장에 따르면 선은 초선에서 4선까지 네 가지로 정의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이고

이것을 바른 삼매라고 합니다.


논장에서는 이것을 색계 선정이라고 정의하고

경장에 나타난 공무변처 등 사처를 무색계 선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禪)과 삼매(三昧)는 동의어로 취급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 선은

첫째 초선, 둘째 2선, 셋째 3선, 넷째 4선입니다.

네 가지 무색계 선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입니다.


경전에서 네 가지 색계 선을 다시 살펴보면,

초선은 일으킨 생각이고, 두 번째는 지속적인 고찰이고,

세 번째는 희열이고, 네 번째는 행복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2선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가라앉고 희열과 행복만 있고

3선은 행복만 있고 4선은 행복도 사라지고 평온이 완성됩니다.

물론 이 넷에 마음이 대상 한 곳에 집중된 상태 즉, 집중은 두루 하고 있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는 초선의 일으킨 생각이 가라앉고

평온, 희열, 행복이 있는 경우를 2선으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선의 경지는 결코 출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마타 수행의 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토대이지만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좌 불교에서 이 선은 사마타의 경지이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번뇌를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는

모든 유위법의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선(禪) 없이 위빠사나 수행만 할 수 있는 것을 순수 위빠사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빠알리어로는 숟다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이 순수 위빠사나는 사마타 수행의 선정 없이 오직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마타 수행을 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 있고,

또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숟다 위빠사나라는 순수 위빠사나를 통해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상 여러분과 함께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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