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64

通達無我法者 2011. 1. 10. 20:1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매사에 적극적인 사람은

하는 일도 많고 더불어 그만두는 것도 빠르게 끝냅니다.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하는 일도 없고 그만 두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습니다.


세상의 일은 어느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으므로

항상 중도를 취해야합니다.


좋은 일에도 적극적일 때와 관망을 해야 할 때가 달라야 하며

나쁜 일은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혜롭다는 것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가 수행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나는 어떠한 수행을 했다‘라고 말합니다.

또는 몇 년을 수행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한낱 관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행경력을 낡은 훈장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수행경력은 다만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한 것입니다.


수행은

단 한 순간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의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며, 관념보다는 실재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수행이 포장되고 삿된 것에 가치를 둘 수가 있습니다.

허나 수행의 가치는 진실에 기초하고 지혜가 있을 때 존중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식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식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네 가지 조건이 성숙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업’입니다.

둘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온도’라는 조건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넷째 물질의 요소인 ‘자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업, 온도, 자양분에 기반하고 있는 물질이 존재하고

지속적인 삶의 흐름을 이루는 것은 바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의식의 흐름이 끊어지면 죽게 되며,

죽으면 마음의 작용과 살아있던 물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에서 정신과 물질이

식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는 가르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하거나 불선한 행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생에서 식의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각각의 마음과 결부되어 끊임없이 정신과 물질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한 시간 동안만 지속한다면 정신과 물질도 한 시간 동안 지속합니다.

만약 마음의 흐름이 백 년 동안 지속한다면

정신과 물질의 수명도 백 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요컨대, 삶이란 정신과 물질과 식의 끊임없는

인과 관계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이 있어서 몸이 생기고

조건에 의해 마음이 인과에 의해서 끝나면 몸도 끝납니다.


무명이 행을 일으킵니다.

사성제에 대한 무명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합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하는 대상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에 이릅니다.


괴로움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의 행복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렇게 업을 짓는 행위들이 낮거나 높은 세계에서 재생연결식에 이르도록 합니다.


이 재생연결식으로 시작하여 죽을 때 까지 마음의 흐름이 계속 진행되고,

이러한 정신적 생명의 본성이 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몸도

업과 마음과 온도와 자양분이라는 네 가지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움직이고 말하는 등의 몸과 말로 하는 행동이

모두 마음에 근거를 두고 생기기 때문에

물질적 현상은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마음에서 생긴 물질에 기반을 두고 알아차려서

그것을 체험으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대념처경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는 걸을 때 자신이 걷고 있음을 알고, 서 있을 때 서 있는 것을 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마음에서 생긴 물질이 마음에 의존하는 것을 체험으로 안다면,

우리는 식이 업에서 생긴 물질, 마음에서 생긴 물질, 온도에서 생긴 물질,

자양분에서 생긴 물질에 기여함을 추론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으로 인해 정신과 물질이 일어난다는

12연기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경험적으로는 재생연결식을 알 수가 없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과거의 다른 어떤 마음도 그 궁극적인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식은 바로 지금 작용하고 있는 것을,

수행자가 항상 알아차리고만 있다면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식에 대한 실체입니다.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식이라고 하는 아는 마음에 의해서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현재의 식에 주의력을 모으면 정신과 물질을 아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것을 알아차리면 안식을 알게 되어

그 안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신과 물질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안식이라 함은 단지 안식만이 아니라 보는 전체, 안문 인식 과정을 듯합니다.

바꿔 얘기하면 먼저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있고, 또 눈이 보는 감각대상이 있고,

다음에 그것을 볼 수 있는 빛이 있고, 빛에 의해서 그것을 보는 안식,

즉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네 가지 조건에 의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성립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통해서 안식을 알면,

안식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무더기뿐 만 아니라

인식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전체, 몸의 물질도 알게 됩니다.


이는 다음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식에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식을 아는 것은

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모든 정신과 물질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감각 접촉을 아는 것은 즐겁고 괴로운 느낌이 생길 때 그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감각 접촉은 움직임과 딱딱함이 드러날 때에도 그들에 기반을 둡니다.

발을 굽히고자 하는 욕구를 주시할 때 그 뒤에 있는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식을 알아차릴 때는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정신과 물질을 압니다.

무언가 기억하려는 것을 알 때는 인식을 압니다.

어떤 것을 하거나 말하려는 의도를 주시할 때에는 또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  

그것이 자신의 탐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짜증을 낼 때 그것이 성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존재를 영원하고 행복한 자아로 보는 자신의 견해를 알아차릴 때

그것이 어리석음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안에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할 때

우리는 탐욕이 없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행하거나 말하려는 자신의 의도에 뒤이어 행동이나 말을 하면,

알아차림을 통해 몸에 있는 물질의 원인으로서의 의식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식과 정신과 물질은 상호 의존합니다.


식이 정신과 물질을 생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과 물질도 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정신과 물질은

함께 생긴 조건에 의지하는 조건 등으로 식에 기여합니다.

모든 마음의 작용과 함께 기여하는 물질적 기반인 몸이 기여해야 식이 일어납니다.


비록 식과 정신과 물질이 상호 의존하기는 하지만

식이 결정하는 요인이므로 정신과 물질의 원인으로 설해집니다.


사실상 행으로 인하여 식이 생길 때,

식의 부수물인 마음의 작용과 행에서 생긴 물질이 동시에 존재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재생의 순간부터 식과 정신과 물질이 함께 생깁니다.


식과 정신과 물질은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여섯 가지 감각접촉과 느낌까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식은 정신과 물질의 원인이고

정신과 물질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원인이므로

부처님께서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며’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법구경은 ‘마음이 마음의 작용을 앞서간다.

불선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따른다.

마치 수레가 소의 뒤를 따르듯이‘라고 말씀드린 법구경 게송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함께 생기지만 마음의 지배적인 역할 때문에

마음이 마음의 작용을 앞서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악하면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말을 하고 나쁜 생각을 품습니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업은 무명에서 생긴 행입니다.

그것은 악한 과보의 잠재력이 됩니다.


모든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의 뒤에는 몇 번씩 나타나는 일곱 개의 속행이 따라 옵니다.

만약 첫 번째 속행이 우위에 서면 현생에서 업의 효력을 발생하고

그렇지 않으면 효력을 상실합니다.


만약 7개의 속행 중의 하나가 우위에 서면

임종의 순간에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을 일으키며

내생의 업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다른 5개의 속행은 적절한 환경을 만났을 때

첫 번째 생에서 마지막 생을 이룰 때까지 업의 효력을 발생합니다.

열반을 성취하고 나서야 비로소 효력을 상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생연결식으로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까지

재생연결식으로 태어난 그 원인의 토대는 항상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재생연결식을 받을 때 생긴 업의 과보는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를 끝낼 때라야 비로소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을 성취하기 전에는 수많은 생애동안 업의 잠재력이 원래대로 남아 있어서

환경이 조성되면 과보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낮은 세계에서 정신적, 육체적인 면에서 고통을 가져옵니다.


선업의 공덕으로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삶의 지위와 상관없이 악업이 따라 와서 항상 괴로움에 시달릴 것입니다.

누구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선행과 불선행을 함께 해서

선과보와 불선의 과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전,

바로 직전에 보살이 어떻게 연기를 숙고했는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한 보살은

정신과 물질, 여섯 가지 감각 장소, 여섯 가지 감각 접촉, 느낌,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

태어남과 죽음에 이르는 인과의 사슬이 됨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정신과 물질은 식을 조건으로 하며,

거꾸로 식은 명색을 조건으로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대전기경은 위빠시 보살이 식과 정신과 물질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숙고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모든 보살들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발견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이 말은 대전기경에 7불 중의 첫 번째인 위빠시 보살이 부처가 되기 전에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역대의 모든 부처, 많은 벽지불들은 모두 한결같이

먼저 원인과 결과라는 12연기를 통찰한 끝에 거기에서 재생연결식을 발견하고

그 재생연결식에 의해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그 정신과 물질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갖고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해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그 느낌이 갈애로 넘어가느냐, 가지 않느냐 하는 자리에서 모두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 자리,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그 자리가

해탈의 자리이고 윤회가 끝나는 자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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