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66

通達無我法者 2011. 1. 10. 23:3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은

네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어느 날 한 순간에 오지만,

오랜 시간 동안 충분한 과정을 거쳐서

지혜가 성숙되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바른 수행 방법과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하며

부단한 인내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7가지 청정과 16단계의 지혜가 성숙되기 위해서는

대상의 네 가지 특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상의 특성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한 단계의 특성을 충분히 알아차려야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특성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모양의 특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대상의 모양이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을 대상으로 할 때 고유한 성품인

지, 수, 화, 풍이라는 4대 요소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셋째로 조건 지어진 특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넷째로 일반적 특성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모두 변한다는 무상과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알고,

그리고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해도 되지 않는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을 알면

연이어 두려움과 괴로움이 생기게 되고

결국은 괴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 비로소 무아를 알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가장 보편적 특성인

무상과 고와 무아의 삼법인을 알게 되면

깨달음이라는 최고의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명색을 원인으로 육입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신과 물질을 원인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연기의 시작은 과거의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고,

다시 과거의 행을 원인으로 현재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며,

현생의 재생연결식을 원인으로 현생의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다시 정신과 물질을 원인으로 육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일어나며,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무명과 행은 과거이고,

그 다음에 오는 재생연결식과 명색과 육입과 접촉과 느낌은

현생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생의 재생연결식에 의해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연이어 육입과 접촉과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다섯 가지는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12연기에서는 이 다섯 가지를 오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12연기의 오온은 연기를 말하기 위해서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온은 동시에 일어나서 동시에 소멸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 말씀드리는 이 순서는 큰 의미는 없습니다.


12연기의 재생연결식은 오온의 식에 해당하며,

정신과 물질은 식을 뺀 수상행과 색을 뜻합니다.

그래서 식(識) 따로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명색이 함께 해야 비로소 식과 명색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명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입과

감각 대상과의 접촉과 접촉을 해서 일어나는 느낌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식과 명색과 육입과 접촉과 느낌을 모두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6입이라고도 하고, 6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6처, 그리고 6근이라고도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6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비담마에서는 6입, 또는 6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매우 뜻 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할 때,

감각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알아차림은 감각기관에 마음을 둡니다.

그래서 6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밖에 있는 감각대상에 마음을 둘 때는 알아차림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볼 때 보는 눈과 밖에 있는 형상을 두 가지를 두고 볼 때,

알아차림이 밖에 있는 형상에 나갈 때는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라는 감각기관의 문에 알아차림을 두고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둘 때,

비로소 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지기가 문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을 문을 지키는 문지기라고 하는 것과 함께,

‘물위에 떠있는 공처럼’ 이라는 비유도 있습니다.


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번뇌의 침투를 막는 역할을 하고

‘물위에 떠 있는 공처럼’ 이라는 말은

항상 알아차릴 대상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진을 찍을 때 밖에 있는 대상이 필름에 와서 찍힙니다.

이때 필름이 밖으로 나가서 대상과 부딪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이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에도 6문에서 대상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입의 원인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명색을 토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지혜는

범부가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12연기를 처음으로 찾아낸,

부처가 되기 전의 보살들만이 이것을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였던 사리풋다와 목갈라나 존자조차도

수다원이 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사리풋다 장로가 된 우빠띠사 사문은

앗사지 장로가 읊은 연기의 게송을 듣고 성자의 첫 단계를 얻었습니다.


앗사지 장로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존자가 되기 전의 

우빠띠사와 꼴리따 사문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모든 법들,

그들에 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앗사지 장로의 이 말을 들은

우빠띠사와 꼴리따는 연기법을 알고 수다원 도, 과를 얻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법의 오묘한 진리를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지적 능력에 따른 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원인과 결과를

별다른 감동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2500년 전 당시에, 불법을 전혀 알 수 없는 시대에는

이런 진리가 매우 경이롭고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석서는 앗사지 장로의 이 게송을 사성제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모든 법은 다른 법의 결과이다’라는 말은

고통의 근원이 갈애라는 괴로움의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게송에서 원인은

괴로움의 원인으로서의 갈애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게송은 괴로움과 그 원인에 대한 진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실 불교의 존립 이유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도 오직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 있습니다.


2500년 전 당시에 영혼은 불멸하여 죽으면 다른 몸으로 이동한다든지,

육체가 무너진 다음에 영혼은 완전히 단멸한다든지, 영혼은 신이 창조했다든지, 등의

영혼의 무한성과 같은 자아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 게송은 원인과 결과만을 인정하고, 영혼의 불멸이나 단멸을 부정했으며,

이 가르침으로 두 사문은 삶의 본성을 꿰뚫는 특별한 통찰지가 생겼던 것입니다.


사실 이는 지금까지 생각해 온 인식의 한계를 뛰어 넘어,

완전하게 다른 차원의 인식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을 말합니다.


청정도론의 대복 주석서인 마하띠까는

이 게송을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원인이 일어나면 저 결과가 일어난다.

이 원인이 멈추면 저 결과도 멈춘다.

그러므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고 괴로움이 있게 된다.

무명의 소멸과 함께 괴로움이 소멸할 때 까지 행 등의 소멸이 뒤따른다.’


마하띠까에 따르면 괴로움의 순관과 역관의 두 가지 측면에서

연기법의 요지가 앞의 게송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주석서와 마하띠까의 견해는 모두 타당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고제와 집제는 괴로움과 그것이 일어나는 측면에서 연기를 뜻하는 반면에

멸제와 도제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측면에서 연기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기는 두 가지 측면으로 비교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제와 집제라는 일어나는 연기와

다른 하나는 멸제와 도제라는 사라지는 연기입니다.


인과의 사슬에서 원인과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생에서의 무명으로 인해 생각과 말과 행이 나타나고

이러한 행이 바로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됩니다.


그러고 나면 현생에서

재생연결식과 정신과 물질, 육입, 감각 접촉, 느낌이라는

다섯 가지 결과가 있습니다.

이 결과들이 이번에는 내생의 원인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갈애와 집착과 태어남이라는 씨를 내생에 뿌립니다.

그 결과로 늙음과 죽음, 슬픔, 괴로움의 싹이 내생에 트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몇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께서 아난다 존자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연기법이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연기법을 순서대로 관하고 또는 역으로 관했습니다.

존자에게는 연기법이 너무나도 명확했으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연기법은 매우 심오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해하기 아주 쉽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아난다가 말하자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세 번이나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이미 이 이야기는 처음에 말씀드렸던 이야기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부처님의 이 말씀은

아난다 존자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고 꾸지람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의 참 뜻은 이런 것입니다.


“아난다여! 너는 지혜가 출중하기 때문에 연기법을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나 남들도 너처럼 쉽게 이해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난다 존자가 어떻게 12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전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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