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구나 괴로우며
그 원인은 자신의 무지와 갈애에 있습니다.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있는 만큼 괴로움이 따릅니다.
바라는 마음은 무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라서
좋은 것도 바라지만 나쁜 것도 바라게 되어 고통이 더욱 가중됩니다.
바라는 마음이나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은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고, 단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처음에는 바람과 괴로움을 알아차려야 하며,
다시 그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가슴이나 머리로 가서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생긴 느낌을 주시해야 합니다.
바람과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괴롭고,
이러한 것들을 알아차리면 즐거움이 옵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해서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며,
나의 것이라고 해서 좋아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여기서 좋아할 나나, 싫어할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견해를 가진 것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한 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며,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나의 느낌은 결코 아닙니다.
몸과 마음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상속되는 과정만 있습니다.
언제나 ‘나’라거나 나의 소유라는 전제가 붙으면
유신견이 생겨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내가 있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내 몸, 내 마음이 아니면 결코 괴로울 일도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계속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갈애는 바라는 마음으로 욕망입니다.
이 욕망이 다음 생을 만드는 새로운 원인입니다.
이러한 갈애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감각적 욕망의 대한 갈애입니다.
감각적 욕망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에 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모든 욕망을 말합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에 부딪쳤을 때
느낌이 일어나고 이 느낌을 좋아해서 더 좋은 느낌을 갖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입니다.
이 갈애는 욕계의 중생에게 가장 보편적인 갈애입니다.
이 감각적 욕망은 극단적 고행과 함께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이 두 가지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중도가 이루어집니다.
감각적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욕망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갈애는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가지고,
더 예뻐지고 더 부자가 되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고,
더 오래 살고 싶은 모든 욕망이 바로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이것은 변하는 것을 거부하고 항상하고 싶은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갈애는 항상 하다는 상견(常見)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항상하다는 상견은 중생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며,
죽은 뒤에도 몸은 사라지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고
새로운 몸을 만든다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대체로 무상, 고, 무아를 수용하는 불교도들은 상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불교도라도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도는
진아, 주인공, 그리고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에 빠져 상견에 동조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특히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이 상견을 수용합니다.
만약에 이 상견이 사실이라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허구에 빠집니다.
그리고 윤회를 끝내는 해탈도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과 변하지 않고 항상하다는 견해는
지혜로 분별된 것이라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 부딪칠 때 우리는 각자의 사상대로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의 지혜대로 선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세 번째 갈애입니다.
세 번째 갈애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의외로 사람들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이번 생으로 끝이라고 하는 견해나,
살고 싶지 않거나 죽고 싶다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단견(斷見)에서 비롯됩니다.
단견은 항상하다는 상견과 반대되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이 단견은 이생으로 끝이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부정합니다.
이처럼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죽은 뒤에 생명이 끝이라는 생각과
생명이 끝나기를 바라는 죽고 싶은 욕망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애는 유물론적이며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윤회를 부정합니다.
물론 이러한 상견과 단견은 모두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갈애는 몸과 마음에 대한 느낌을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를 깨닫지 못한데서 비롯된 견해들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갈애와 갈애로 인해서 생긴 새로운 태어남의
괴로움에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갈애는 느낌을 원인으로 일어납니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는
더 즐거운 느낌을 원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갈애가 생깁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운 느낌을
다른 느낌으로 대체하려는 갈애가 일어납니다.
덤덤한 느낌도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 역시 갈애의 대상입니다.
바로 갈애가 있어서 윤회하기 때문에
서른한 개의 세계에 사는 모든 생명은 모두 갈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인은 천상에서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살면서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갈애를 가지고 삽니다.
욕계 천상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능력껏 감각적 쾌락을 추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채울 수 있는 욕구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조하거나 때로는 분발하기도 합니다.
부자들도 감각적 욕망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돈, 지위, 명예, 사랑 등등 가진 자가 더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감각적 욕망이 발전적인 쪽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없을 때 억눌린 감정이 있으면 다른 쪽으로 폭발하여 과소비를 하거나 탈선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또 다른 쪽의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갈애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갈애도 있고,
좋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갈애도 똑같이 있습니다.
다음에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생명들도
무지로 인한 감각적 욕망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천인들은 좋은 쪽의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지만,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4악도의 생명들은 여전히 좋지 않은 쪽의 감각적 욕망을 추구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죄의 형벌을 받으면서 다른 범죄를 공모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토록 윤회하는 세계에 사는 모든 생명은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를 일으켜서 끝없는 태어남을 갖습니다.
그 태어남이 천상의 태어남이라고 할지라도 괴로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천상은 행복의 무료함이 오히려 괴로움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상의 수명이 다 하면 다음 생에 어디로 떨어져서 또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될지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천상의 행복도 완전한 지혜가 있는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갈애가 있는 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이 있는 한 번뇌가 계속됩니다.
번뇌가 있는 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번뇌가 있는 한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번뇌를 또 다른 말로 하면 더러움, 오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번뇌는 열 가지가 있습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사견, 의심, 혼침, 들뜸,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입니다.
이토록 번뇌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바로 이러한 번뇌가 갈애를 가지고 사는 생명들의 공통적인 유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갈애가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갈애가 번뇌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수행자 여러분!
누구나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즐거움에 취하면 괴로움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괴로움을 모르면 즐거움을 집착하여 더 큰 괴로움에 빠집니다.
누구나 더 나은 즐거움을 찾지만 자신이 만족할만한 즐거움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이 바로 괴로움인 것입니다.
이처럼 즐거움이 괴로움이란 것을 알면 즐거움을 탐내지 않게 됩니다.
즐거움이란 항상 감각적 쾌락으로 발전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즐거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괴로움이고,
괴로움을 알아차리면 번뇌가 사라진 청정한 즐거움을 얻습니다.
우리가 들뜨고 흥분하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때는 이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대상을 알려고 하지 않고 주저하는 것이며,
마음이 명확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나 자신이 처한 문제를 밖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문제는 오로지 자신만이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단지 길을 알려줄 수 있을 뿐이지 해결은 자신의 마음이 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것도 스스로의 마음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스스로의 마음입니다.
또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일어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답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마음이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복잡해 보일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지가 의심케 하며 의심은 의심을 낳습니다.
의심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있습니까?
나는 과연 항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 순간의 정신과 물질일 뿐이지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항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 순간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적 과정으로의
단지 호흡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원인은 가까운 원인이 있고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원인은 다양 하지만
근본 원인은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명과 갈애입니다.
밖에서 답을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순간 현재의 마음과 몸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현재를 알아차려서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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