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76

通達無我法者 2011. 1. 16. 20:5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탐욕은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하는 행위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며 불행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가져오는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탐욕의 뿌리는 무지이며

탐욕은 탐욕을 영양으로 먹고 자라기 때문에

그칠 줄 모르는 특성이 있습니다.


탐욕은 항상 끈끈이처럼 대상에 엉겨 붙으면서

뜨거운 불판에 달라붙는 고기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탐욕은 거친 욕망으로 끊임없이 헐떡거리면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야수적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탐욕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며

거친 것과 중간 것, 미세한 것들이 있습니다.

거친 탐욕은 쉽게 드러나서 알 수 있지만,

미세한 탐욕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알기가 어렵습니다.


탐욕을 유발하는 것은 선하지 못한 마음이며,

선하지 못한 과보의 영향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자극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또는 외부의 자극을 받아서 유발되어 일어나기도 합니다.


탐욕은 좋은 것뿐이 아니고 나쁜 것까지 포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으로 발전하여 불선행을 하게 되어,

결국 손해를 보고, 지탄을 받고, 건강을 잃고, 비탄에 빠지고,

자신을 해치고 난 뒤에 남까지 해치게 됩니다.


탐욕은 윤회의 세계를 돌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연료입니다.

탐욕 없이 보았을 때라야 비로소 법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탐욕의 폐해는 수행을 할 마음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며,

수행을 한다 해도 탐욕을 가지고 하면 결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탐욕이 소멸되었을 때만 있으며,

무지가 지혜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완전하게 탐욕이 소멸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세 가지 종류의 갈애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갈애로 일어난 번뇌는 과연 몇 가지가 되는지

오늘은 그 번뇌의 종류를 알아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번뇌의 종류는 백여덟 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108가지 번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갈애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둘째 존재에 대한 갈애,

셋째 비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이런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어떻게 생기는가 하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일어납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갈애도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만이 일어납니다.

 

마지막 비존재에 대한 갈애도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상 세 가지 종류의 갈애가

각각 여섯 가지 감각 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일어나기 때문에

세 가지와 여섯 가지를 곱하면 열여덟 가지가 됩니다.

그래서 열여덟 가지의 갈애가 생깁니다.


이상의 열여덟 가지 갈애가 생겼는데, 

다시 이 갈애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갈애가 있고,

마음 밖에 있는 경계로부터 일어나는 갈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일어나는 두 가지 장소의 갈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열여덟 가지의 갈애가 안팎으로 일어나면 서른여섯 가지의 갈애가 됩니다.


이런 서른여섯 가지의 갈애가 각각

과거의 갈애와 현재의 갈애와 미래의 갈애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36가지를 3으로 곱하면 108가지 갈애가 됩니다.

이처럼 108가지의 갈애를 다른 말로 하면 108번뇌라고 합니다.


하지만 갈애의 기본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상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갈애를 기본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갈애가 모두 108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이 일어나면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가 일어나면 연기를 회전시켜 윤회를 지속시키기 때문에

이것을 번뇌라고 합니다.


그래서 번뇌의 굴레가 행위를 하게 하여 업의 굴레를 만들고,

다시 행위를 한 과보가 뒤이어 따르므로 과보의 굴레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과보의 굴레가 다시 번뇌의 굴레를 돌리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번뇌는

느낌을 원인으로 일어난 갈애의 종류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지 않고 어떻게 살아’ 라고 말하지만,

실제 사소하게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번뇌는

108가지 많은 숫자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괴로운 감각대상과 부딪치는 사람은 즐거운 대상을 갈망합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고통이 없는 것을 갈망합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괴로운 사람은 행복을 갈망합니다.

사람들은 고통, 빈곤, 괴로운 대상과 느낌 등에서 벗어나길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것은 행복을 뜻합니다.

우리는 괴로운 생각으로 비롯된 번민과 의식주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일단 생활의 필수품이 풍족하게 갖추어지게 되더라도

또 다른 갈애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부자는 재산을 더욱 더 늘리고자 한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족을 모르는 것이 갈애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삶의 좋은 것들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재산을 늘리려고 합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하고,

삶의 질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을 더 향상시키려는 욕망이 커집니다.

느낌에 의해 자극받고 지속되므로 갈애는 결코 느낌이 있는 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느낌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느낌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한 그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난 갈애 때문에

한날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이 괴로움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되겠습니다.


또 덤덤한 느낌은 섬세하고 미세한 느낌이지만 즐거운 느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덤덤한 느낌은 일반적인 감각대상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보다 좋은 음식과, 보다 좋은 옷과, 보다 좋은 감각대상과,

보다 나은 생활 여건을 바라도록 부추깁니다.


이처럼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덤덤한 느낌이나

모든 느낌은 반드시 갈애가 뒤따릅니다.

 

 

즐거운 감각대상은 보다 좋은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생기게 합니다.

괴로운 대상은 그것을 없애고자 하는 욕망을 생기게 합니다.

덤덤한 대상은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생기게 해도

여전히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것들을 갈망합니다.

이 모든 것은 느낌이 어떻게 갈애를 생기게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가 일어나면 윤회를 계속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순간에

아는 마음인 식이 일어남과 동시에 정신과 물질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감각접촉, 느낌이 일어납니다.


번뇌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않은 모든 범부들은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갈애는 선하거나 불선한 업을 짓도록 하는 집착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착으로 인해서 업을 생성하게 됩니다.


특정한 조건 하에서 생긴 업의 생성은 중생으로 하여금

늙음과 병듦, 죽음, 근심과 다른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도록 하는 재생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느낌이 어떻게 윤회에 이르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재생연결식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과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감각접촉과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도 감각접촉으로 인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이 생깁니다.

그 분들도 육체적인 고통에서 생기는 통증을 똑같이 느낍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아라한은 정신적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며 즐거운 감각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느낌만 있지, 그 느낌으로 인해 생긴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 분들은 즐거움이나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업을 짓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재생과 정신과 물질과 기타 괴로움의 원인을 없앱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의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그래서 성스런 도에서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갈애의 완전한 소멸로 집착이 소멸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아라한이 아닌 사람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면

삶의 좋은 것들에 대한 갈애가 생깁니다.

하지만 성스런 도의 연이은 단계들을 모두 거친 다음

아라한과를 얻은 사람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 자신의 행복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아라한에게는

아무리 매혹적인 감각대상에도 끌림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며

이는 업의 형성력인 행과 재생과 그에 수반되는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집착이 소멸하면 태어남의 원인인 업의 생성이 소멸한다.

업의 생성이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 죽음, 근심 등이 소멸한다. 라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

사랑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은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상대가 잘되는 것을 질투하거나,

슬픔에 빠진 것도 좋아서 집착하게 됩니다.


무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갈애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에는 집착을 하게 합니다.

 

이런 집착은 모두 느낌으로부터 시작되며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사랑하는 것을 집착하고 있는지,

아니면 미워하는 것을 집착하고 있는지

이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려보십시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싫어하는 것이 있을 때 싫어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때 싫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난 뒤에 싫어하는 마음을 보십시오.

그리고 가슴으로 가서 두근거리는 느낌을 지켜보십시오.


좋아하는 것이 있을 때 좋아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때 좋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난 뒤에 좋아하는 마음을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가슴으로 가서 두근거리는 느낌을 보십시오.


당신이 싫다거나 좋다고 말한 것은 갈애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지금까지 당신을 괴롭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법이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법이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차려야만 비로소 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법에는 선과 불선이 없습니다.

법이란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불선은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적 행위이며

그것들은 반드시 결과가 있으며 오직 과정일 뿐입니다.


선이 있지만 선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불선이 있지만 불선이라고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선도 알아차리면 선이 되고

선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불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행복을 찾는 유일한 길은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갈애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집착과 업의 생성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 시간에도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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