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74

通達無我法者 2011. 1. 15. 23:2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깨달음의 황금의자는 느낌입니다.

윤회는 느낌에서 갈애 사이의 길목에서 결정됩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윤회를 하는 것이고,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윤회가 멈춥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가장 화려한 황금의자는

인도의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나무 밑이 아니고,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입니다.


윤회를 계속 돌게 하는 것도 느낌이며,

윤회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도 느낌입니다.

오직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에서만 깨달음이 있습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느낄 때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무지로 가는 길이 지혜로 가는 길로 바뀌게 됩니다.

오직 이 순간에만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무명을 원인으로 시작된 연기에서 느낌까지 왔습니다.


연기의 시작인 무명과 행은 과거입니다.

그리고 재생연결식과 정신과 물질, 6입, 접촉, 느낌은 현재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현재일 뿐만 아니라 12연기의 5온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원인인 무명과 행으로 인해서 현재의 결과인 5온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원인인 무명과 행이 없으면 현재의 5온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과거의 무명과 업의 형성인 행으로 인해

현재의 결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렇게 부모를 만난 것이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나,

또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나, 이러한 용모를 가진 것이나,

모두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서 생긴 현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길만 해서 생긴 것이지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어디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현재의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자아가 있어서 다음 생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과거의 업이라는 조건이 과보라는 형태로 현재에 나타난 것입니다.


처음부터 순간순간의 마음과 몸만 있지

내 마음대로 하는 자아가 있어서 다음에 상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공부해온 내용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연기가 회전합니다.

이것이 순간의 윤회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부처나 아라한이 아닌 모든 생명들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 끝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을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좋은 느낌을 원합니다.

이렇게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부귀영화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러나 부귀영화가 와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부귀영화를 얻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돈, 사랑, 명예, 미모, 술, 담배, 좋은 집과 화려한 의상,

이러한 것들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있는 그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느낌과 갈애,

두 가지가 소멸되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집착을 하고 업을 생성하여

미래에 태어날 조건을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는 무명을 우두머리로 삼고 살았으며,

현재에는 갈애를 동반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과 갈애,

이 두 가지가 생명이 윤회하는 근본원인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자신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마십시오.

바로 무명과 갈애가 모든 것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의문을 푸십시오.

그래서 모든 일의 바탕에 무명과 갈애가 있어서

연기를 회전시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느낌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이 갈애는 과연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갈애는 바라는 마음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욕망, 목마름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갈애는 선한 갈애도 있고 선하지 못한 갈애도 있습니다.


출세간의 관점에서는 선하건 선하지 못하건 갈애가 있는 한

윤회계에 머물기 때문에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갈애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범부의 시각이고, 하나는 성자의 시각입니다.


범부는 보통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욕망을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성자는 지혜가 난 사람입니다.


범부는 갈애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라지 않고 어떻게 살아! 이렇게 말합니다.

갈애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은 무명의 지배를 받아서

갈애가 가진 해악을 모르고 오히려 필요한 것으로 봅니다.


무명은 좋은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갈애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인간이 바라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범부는 아직 출세간의 지혜가 나지 않아서 감각적 쾌락을 행복으로 압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바랍니다.


그러나 성자는 선한 것만 바랍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 까지는 수다원이나 사다함이나 아나함에게도 갈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갈애는 아라한이 되기 위한 선한 갈애입니다.

이런 갈애는 범부가 연기에서 말하는 그런 갈애와는 다릅니다.


연기를 끊기 위한 수행을 바라는 갈애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갈애는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갈애라고 해서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바람은 언제든지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 성자가 되지 않은 범부가 바라는 것은

균형이 깨진 지나친 갈애라서 문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부가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라되, 필요해서 하는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람이 있되 욕망이 아닌 필요에 의한 바람이 됩니다.


곧 바라되 균형이 있는 바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갈애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조건 바라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느낌을 알아차려서 욕망으로 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차츰 성자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 아라한이 되었을 때 완전하게 갈애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아라한이 윤회를 하지 않는 것은 갈애가 완전하게 소멸되었기 때문에

다음 생의 원인을 만들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도 아직 갈애가 남아 있습니다.

단 이들은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선한 갈애가 있을 뿐입니다.


범부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서 돌아올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연기를 회전시킵니다.

수다원은 갈애로 넘어가서 다시 맨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걸립니다.

사다함은 갈애로 넘어가서 다시 맨 느낌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수다원보다는 조금 빠릅니다.

그리고 아나함은 미세한 차이로 갈애로 넘어가서 불가피 윤회를 합니다.


이처럼 갈애로 넘어가서 맨 느낌으로 돌아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지혜의 힘입니다.

아라한은 완전한 지혜가 나서 아예 갈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황금의자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자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나 아라한이나 깨달음을 얻은 모든 성자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바로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히말라야에 가야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특정한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스승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느낌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위빠사나 수행이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선언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빠사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고,

몸과 마음 안에 있는 느낌을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함으로 인해 갈애가 끊어집니다.


갈애가 끊어지면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갈애가 끊어지면 무명이 사라집니다.

무명이 사라지면 갈애가 있는 자리에 지혜가 자리 잡고 있어서 연기를 회전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깨달음은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다는 것을.

행복과 불행은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가 조건을 성숙시켜서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판단할 근거가 마련된 셈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과 느낌이 함께 일어났을 때 좋아했는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좋아한지를 모르고 계속 좋아하면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하여

연기를 회전시켜 윤회를 하게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뿐인 새로운 태어남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네!’ 라고 알아차리면 갈애로 넘어갔다가 다시 맨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고 그 순간 윤회의 흐름도 멈춥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깨달음으로 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더 가까운 길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났을 때

미워하거나 싫어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모르고 계속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갈애가 생긴 것입니다.

계속 미워한다는 것은 미워하는 것을 좋아서 집착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좋아서 계속합니다.

싫으면 어떤 것도 계속하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미워하는 것을 계속하면 갈애가 집착으로 발전하여 연기를 회전시켜

결국 좋지 않은 태어남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미워하고 있을 때 ‘미워하네!’ 하고 알아차리면

갈애로 넘어갔다가 다시 맨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고 그 순간 윤회의 흐름도 멈춥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깨달음으로 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 길을 향해서 더 가까이 간 것입니다.

이렇게 가는 길이 바로 괴로움을 여읠 수 있는 길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스스로 실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평생 동안 좋아하거나 미워하면서 괴로움을 겪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랬네!’ 하고 무엇이나 알아차려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가,

이제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과거에는 몰라서 업을 지어 이번 생을 받았고,

이번 생에서는 갈애 때문에 업을 만들어서 다음 생을 받습니다.


인간의 삶은 앞선 조건이 현재를 있게 하고, 현재의 조건에 의해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단지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는 성별, 나이, 출신, 재산, 지위, 학력과는 무관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관념입니다.

오히려 관념이 많을수록 사람 됨됨이가 나쁠 수도 있습니다.


바른 사람은

관용과 자애를 가졌는가,

계율을 지키고 있는가,

수행을 하여 지혜가 계발되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제 여러분의 길은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하십시오.

그 길목은 항상 느낌의 길목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의 길목에서 바라는 갈애가 일어나면

여러분들은 번뇌뿐인 괴로움의 새로운 시작을 선택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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