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73

通達無我法者 2011. 1. 15. 21:5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특별한 느낌을 찾지 마십시오.

느낌은 자신의 몸과 마음 안에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느낌을 찾지 마십시오.

누구나 항상 특별한 느낌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알고 있는 것이 모두 느낌입니다.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느낌을 찾지만

그런 느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느낌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일어난 곳에서 사라지고, 일어난 즉시 사라집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도

덤덤한 느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 무지의 느낌입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순간 무지가 사라집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지혜가 나며 번뇌가 제어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감각 기관에 대상이 접촉하는 것을 모르면

느낌이 일어난 것을 모릅니다.


느낌이 일어난 것을 모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모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모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모릅니다.


무상을 모르면

모든 일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괴로움을 모르면

마음은 있지만 자아가 아니라는 무아를 모릅니다.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모르면

집착이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집착이 끊어지지 않으면

지고의 행복인 열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6입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나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지수화풍 4대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풍대인 바람의 요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풍대인 바람의 요소는

몸의 어느 부위의 움직임에서 항상 드러납니다.


그러한 움직임과 배가 일어나고 꺼짐에서

뻣뻣함을 아는 것이 바로 바람의 요소의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느슨함도 바람의 요소로서의 한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의 팽팽함과 느슨함을 언급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고, 숙이고, 기울이고, 옮기는 것도

바람의 요소의 역할입니다.


손을 구부릴 때 손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수행자는

바람의 요소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됩니다.


걸을 때 주의를 집중할 때에도 그것을 압니다.

그러한 움직임에서 대상을 남자나 여자나 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몸의 대상을 지수화풍 4대로 볼 때

거기는 자아가 있다, 남자다, 여자다, 나의 몸이다, 하는 것들이 붙지를 못합니다.


수행자는 바람의 요소의 참된 본성을 뜻하는 점진적 움직임이라고만 알 뿐입니다.

수행자는 또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일 때에도

무언가가 밀고 있다든지 다른 것을 끌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자는 정신의 시계 내에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서 바람의 요소를 압니다.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인도함으로 나타남’ 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땅의 요소와 불의 요소와 바람의 요소라는

이 세 가지 근본 요소는 모두 감촉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습니다.

들음 등을 통해서 알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것이 거친지 부드러운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뻣뻣한지 견고한지

움직이는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물의 냄새나 맛이나 형상도

그 사물의 근본 성품에 대해서 알려주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봄을 통해서

근본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대중화 된 믿음입니다.

이때 근본 요소가 지수화풍 4대입니다.


바윗덩어리나 쇳덩어리가 확실히 우리에게 단단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은 봄으로써 생긴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촉을 토대로 한 귀납적인 일반화일 뿐입니다.

여기서 귀납적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 알고 있는 것을 추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시각적인 현상일 뿐이고

단단한 땅이라고 믿고 디뎠다가 수렁에 빠진다든지,

뜨거운 쇠막대기를 모르고 잡았을 때 화상을 입는 경우처럼

시각적인 형상은 때때로 그릇된 인상을 줍니다.


바람의 요소도 봄으로써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여기저기서 보기 때문이며

그 움직임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움직임을 알아차려서 얻은 추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멈추고 있던 두 대의 기차 중 한 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움직이지 않고 있는 다른 기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달리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는 승객에게는

창밖의 나무들이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시각적인 착각은 움직임의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눈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한 때 영상에 관심이 많은 나이 지긋한 남자 수행자가

스승인 비구와의 대화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베개를 집어 흔들면서 비구에게

“자! 스님, 지금 어떤 법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음! 바람의 요소인 풍대의 요소가 사라지고 있음을 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님! 틀렸습니다. 스님께서 눈으로 보고 계신 것은 형상일 뿐입니다.

보는 순간을 알아차리신다면 스님은 형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아실뿐입니다.

보는 순간에 바람의 요소에 대해서 아무 것도 체험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는 내관에 의해서 실제로 아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추론에 의해서 다른 사실을 주시하고 깨닫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감각 대상에 해당하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만

감각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람의 요소는 몸의 접촉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대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걷거나 구부리거나 하는 동안

내적으로 알아차림을 한다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스님께서 바람의 요소와 접촉하지 않으면서 그 소멸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부자연스럽고 틀렸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남자 신도의 비평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스승들은 염처경과 다른 경전들을 참고용으로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현상만 다루는 논서를 근거로 순전히 이론적인 가르침만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행자들을 영적으로 이롭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한 통찰지나 성스러운 도의 단계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추론적인 내관을 통해서도 통찰지를 얻는 근기를 타고 난

일부 수행자들만이 유일한 예외입니다.


염처경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여섯 가지 감각 기관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에까야노 막고’ 라고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부처님은 “몸과 마음을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 지혜로 알아야만 열반에 이를 수가 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은 ‘에까야노 막고’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신식(身識)에 대응하는 감촉의 경우

우리는 내부와 외부적으로 몸이 맞부딪힘을 알게 될 때

감촉을 주시하고 인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촉은 무명이나 다른 번뇌와 결합해서

우리를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촉이 항상하고 행복하고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감촉을 통해 몸의 어떤 부위들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차별을 하게 됩니다.


모든 감촉을 주시하여 그 감각의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실체가 없는 본성을 깨닫는다면 거기에는 집착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깨달음과 열반에 확실히 이르는 위빠사나 수행의 바른 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무명에서부터 느낌에 이르는 연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무명이란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해 범부들은 감각 대상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범부들은 현생이나 내생에서 행복을 얻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행위들은

선하거나 불선한데, 그러한 행위를 업의 형성력인 행이라고 합니다.

행은 새로운 존재를 생기게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새로운 생의 재생 연결식을 조건 짓는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가집니다.


재생 연결식에 관여하는 특별한 대상이 없는 경우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전생에 임종할 때 표상과 함께 재생연결식의 대상으로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이 잠재의식의 마음은 보거나 듣는 등의 순간에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전향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눈과 형상에 의존하는 안식이 일어납니다.

이 안식은 식의 상태 즉, 행에 의해 조건 지어진 정신적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즐거울 수도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이에 상응하는 안식과 이식 등등은 전생의 선하거나 불선한 업인

과거의 행위의 도덕적 특성에 기인합니다.

이것은 여섯 가지 감각 대상에서 생기는 여섯 가지 식에 모두 적용됩니다.


생각, 상상, 의도 따위로 구성된 정신활동을 뜻하는 의식(意識)은

잠재의식의 마음, 전향하는 마음, 육체적 토대, 정신의 표상에 의존합니다.

이 정신활동 즉, 의식은 일곱 개의 속행과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등록하는 마음은 선업이나 불선업의 결과입니다.


속행은 업의 과보는 아니지만

논장에서는 행의 결과인 잠재의식에서 생긴다는 뜻에서

행의 기반을 둔 식이라고 말합니다.


식이 일어남과 함께 다른 부수되는 정신과 물질 현상도 덩달아 일어납니다.

그래서 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식이 일어난 다음에 여섯 가지 감각 장소인 육입과

여섯 가지 감각 접촉까지 따라 일어납니다.


감각 접촉이라는 것은 마음과 마음의 대상과 감각 기관의 결합을 뜻합니다.

감각 접촉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생기게 합니다.

덤덤한 느낌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인상을 주지만

아비담마에 따르면 사실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없는 것일 뿐,

일종의 미세한 즐거운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무명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난다’ 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쾌락은 선하지 못한 행위로 인해서 일어나는 한 순간의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 과보는 한 생뿐이 아니고 몇 생까지 계속될 수가 있습니다.


평등심도 선한 행위로 일어나는 한 순간의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 과보는 한 생 뿐이 아니고 몇 생까지 계속될 수가 있습니다.


선심과 불선심이 생멸한 뒤에 나타난 그 과보도 다시 생멸합니다.

그러나 기억이 그것을 계승시켜 계속해서 유지하게 합니다.

기억은 현재의 것이 아니고, 과거의 것을 형상화한 허상입니다.

느낌도 매 순간 변하는 것으로, 진실은 변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심과 불선심이나 느낌은 생멸하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실체가 없지만 그 과보는 행복과 불행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항상 느낌을 느끼면서 삽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매 순간 변합니다.


만약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느낌으로 알 때는,

매 순간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 느낌은 감각 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나의 느낌이 아닙니다.


여러분!

즐거움과 괴로움은 한낱 느낌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즐거움과 나의 괴로움이 결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초기불교 > 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연기와 위빠사나/75  (0) 2011.01.16
12연기와 위빠사나/74  (0) 2011.01.15
12연기와 위빠사나/72  (0) 2011.01.15
12연기와 위빠사나/71  (0) 2011.01.12
12연기와 위빠사나/70  (0) 201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