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나치게 목적에 집착하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진실이 아닌 것도 진실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거짓이 진실 같은 세상을 삽니다.
오직 목적 하나에 매달리면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무시하게 되어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높은 이상을 가진 목적이 필요하지만
일을 할 때는 목적을 잊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지 해야 할 일이라서 해야 합니다
세상은 온갖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의 성취를 위해서 진실을 외면합니다.
이렇게 해서 목적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바른 성취가 아닙니다.
오히려 얻은 것으로 인해 해로운 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목적에 함몰된 자기 마음이 자기를 속이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부처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제일 먼저 이 깨달음을 누구에게 펼까 숙고 하다가
무색계의 3선정에 이르게 하신 스승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라 깔라마는 일주일 전에 세상을 뜬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색계의 4선정을 알게 해준 웃다카라마 뿟다에게 법을 펴려고 합니다.
그런데 웃다카라마 뿟다가 어제 세상을 뜬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함께 수행을 하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
초전법륜경을 설하며 법의 수레바퀴를 돌리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법의 인연이라는 것이 이토록 오묘한 것입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부처님의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하루 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법의 인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요함이 대상인 선정 수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선정 수행인 사마타는 번뇌를 억제하는 하나의 수행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뇌를 억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타 수행도 위빠사나 수행을 도와주는
하나의 수행 방법이라는 사실도 유념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관념을 대상으로 하면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차리는 수행이라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으로 무상, 고, 무아의 통찰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상좌 불교의 독단적 교리가 아니고
모든 사람이 번뇌를 여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반적인 수행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간 이러한 수행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배척 할 것이 아니라
경전에 기록된 그대로의 수행방법을 받아들여서
자신이 가진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왜곡해서 오는 피해는 고스란히 자기의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주장하여 스스로를 속박 할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른 것도 배워보려는 선한 의도를 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내 몸과 마음도 내 것이 아닌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내 것인가요?
과연 그런 나는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최고의 진리인가요?
또 다른 최고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경험해 볼 아량은 혹시 없는가요?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서른 한 개의 존재의 세계에 대한 태어남을 설명한 것은
경전에 있는 기록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건 믿지 않건 그것은 듣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다만 이런 존재의 세계가 있다는 것과
이 존재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모두 자신의 과보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세계에 태어나든 죽으면 다시 다른 세계에 태어납니다.
생을 끝내고 싶어도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 전제를 놓고 볼 때, 이왕이면 선행을 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더 훌륭한 선택이라면 괴로움뿐인 영원한 윤회에서 벗어나는 수행을 하여
해탈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서른한 개의 세계는
부처님께서 이것만을 말하기 위해서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우주적인 이론도 설명을 시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것과 업의 과보를 받는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이 밝혀진 것들입니다.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에는 이러한 세계가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러한 존재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교는 자신이 체험을 통해서 이성적인 판단이 섰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실재 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어떤 강요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 수 없는 것은 무조건 배척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런 판단을 유예하고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통찰 지혜를 얻는 것을 권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나면 이러한 존재의 세계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지혜가 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믿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고
자신이 실천적 수행을 통해서 경험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질 것을 권합니다.
지금은 자신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서른 한 개의 존재의 세계들 중에
선정수행을 통해서 갈 수 있는 세계는 색계, 무색계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색계 무색계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색계 선정수행과 무색계 선정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 수행이 바로 사마타 수행입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는
윤회가 끝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색계 4선정의 세계와 무색계 4선정의 세계는 사마타 수행으로 실현될 수가 있지만
위빠사나 수행으로는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로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영역이 서로 다릅니다.
사마타 수행은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여 고요함을 얻지만
무명과 갈애를 부수는 통찰 지혜가 없기 때문에 해탈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윤회계 안에서 높은 의식의 세계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아예 존재의 세계를 벗어나는 해탈에 이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위빠사나 수행 없이는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사마타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부처님 이전에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사마타 수행 밖에 없었지만
부처님께서 찾아내신 대상과 분리해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이 나와서
비로소 두 가지의 수행방법이 생긴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도 부처님 이전에는 막연하고 구체적이지 못했지만
부처님께서 비로소 완전한 사마타 수행체계를 세우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체계화하신 사마타 수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마타는 고요함. 맑음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선하지 못한 법이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이 사마타 수행을 지(止)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
이 때의 지는 멈출 지(止)입니다.
이 말은 집중 또는 삼매의 동의어입니다
사마타라는 말에서 집중이라는 의미의 사마디가 파생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매. 집중이라고 하는 말은 사마타 수행에서 유래된 용어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말씀드린 것처럼 색계 4선정과 무색계 4선정의
여덟 가지 선정의 경지를 마음 집중으로 이룬 것을 말합니다.
이 때의 마음 집중을 심일 경성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빠알리어로는 찌타사에까가타라고 합니다.
이러한 경지들은 마음이 한 끝으로 집중이 되어서
마음의 동요가 가라 않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 또는 사마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때의 사마타 수행은 근접 집중을 통해서 근본 집중에 이릅니다.
그리고 알아차릴 대상은 실재가 아닌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여기서 실재라는 것은 몸과 마음의 느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마타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인 몸과 마음이 아니고
어떤 형태 모양 관념 명칭 등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의 대상은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사마타 수행 방법에 대한 다양한 명상 주제가 언급 되고 있는데
주석서에서는 38가지로 나타나 있고,
붓다고사가 쓰신 청정도론에서는 40가지가 기록 되어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마타 수행의 핵심은 표상이라는 개념입니다.
대상에 집중을 해서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일으키고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닮은 표상이 됩니다.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섯 가지 장애가 극복되고
마음 집중이 되는 것을 근본 집중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핵심입니다
사실 사마타 수행은,
수행을 시작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다섯 가지 장애인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 혼침과 게으름. 들뜸 .회의적 의심을 억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행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를 꿰뚫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마타란 마음과 대상이 온전하게 하나가 되어서
탐진치가 잠복된 상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마음이 고요함에서 벗어나면 잠복한 탐진치가 강하게 튀어나와 억누른 만큼 공격합니다.
그래서 이때는 사마타 수행에서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때 위빠사나의 강력한 통찰 지혜를 개발하여 강하게 나타난 번뇌를
있는 그대로 지켜봐야 합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여실 지견을 할 때만이
번뇌가 뿌리 뽑혀 어리석음이 제거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화를 낼 때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화를 내면 제일 먼저 자신부터 해칩니다.
화는 자신이나 남에게 모두 고통을 줍니다.
남을 미워하고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사악해집니다.
화를 내는 마음은 더욱 화를 부추겨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어 결국 파국을 맞습니다.
화는 자신의 마음이 분노로 무너진 것이며, 그래서 뜨거운 불길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화를 내면 지위가 높거나 명예가 있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 해도 추하게 보입니다.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은 세상과 격리되며, 친구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조차도 피합니다.
자신의 고요함과 지혜를 도둑질하는 화는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러한 화를 낼 경우에 사마타 수행은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외우거나, 절을 하거나, 특별한 것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알아차림을 계속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때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화를 낼 때 화내는 마음을 봅니다.
그리고 화낸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 가슴에 두근거리는 느낌을 겨냥합니다.
이렇게 해서 화를 없애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은 상호 보완적으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수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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