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상대가 화를 낼 때 꼭 나 때문이라고 알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자신의 문제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설령 나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라고 해도
근본원인은 화를 내는 사람의 선하지 못한 마음에 의한 것입니다.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은 그의 축적된 성향이기도 하며
그가 다른 일로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화는 화를 낸 사람의 것이지 당하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화를 내가 받아들여서 괴로워할 것이 없습니다.
상대가 화를 낼 때 내가 걸린다면 이것은 세속의 무지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화를 낼 때 내가 걸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출세간의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비난할 때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아직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얻은 자와 같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상대가 화를 낼 때 반응하는 사람은 아만심이 강하고 탐욕이 많으며
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지의 뒤에 숨어있는 가장 큰 번뇌는 상대에 있지 않고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있습니다.
내가 있다고 알 때는 항상 화가 동반하기 마련이며
내가 없다고 알 때 비로소 언제나 고요함과 평화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제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천상의 제석은 항상 행복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석을 시중드는 천녀들도 높은 지위의 여왕인 천녀들 가운데 있으면
자신은 아무 보잘 것이 없기 때문에 비참하고 불행하다고
까사빠 장로에게 말씀드린 것으로 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천인들은 몸에 장식한 꽃이 시들고, 양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고,
다른 늙음의 징조들로 죽음이 닥쳐오는 것이 예고될 때 불행해진다고 합니다.
또 어떤 천인들은 천상의 쾌락에 몰두해 있는 동안
마치 뇌졸중으로 목숨이 끊어지는 사람처럼 갑자기 죽습니다.
죽음은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한순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천상이 행복하고 화려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천인도 죽을 때 다섯 가지의 조짐이 나타납니다.
첫째, 자기가 장식한 화환이 시듭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꽃들, 자기 몸에 있는 꽃들이 시듭니다.
둘째, 죽어갈 때는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 낡아집니다.
세 번째, 천인도 죽기 전에는 겨드랑이에서 땀이 난다고 합니다.
네 번째, 몸에 나쁜 색깔이 나타납니다.
화려하던 광채가 나던 몸에 차츰 죽음의 기운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천인이면서 천인의 자리에 있지 못한 채 서성거리면서 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천인의 죽음도 결코 화려한 것만은 아닙니다.
수행자 여러분!
태어남은 그것이 사악도이든 인간이든 천상이든
반드시 괴로움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되겠습니다.
수브라흐마 천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브라흐마 천인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꽃을 따고 있던 그의 시종인 천녀들이 갑자기 죽어서
모두 무간지옥에 태어났습니다.
수브라흐마 천인은 시종들이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자신도 며칠 뒤에 죽어서 그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천인은 부처님을 찾아가서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번뇌를 끝내는 데 이바지하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와
두타행과 사정근인 네 가지 바른 노력을 닦고
번뇌를 피하는데 도움을 주는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계율,
그리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출리를 뜻하는 열반 이외에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자 천인과 그 시종들은
성스러운 도의 첫 단계인 수다원과를 성취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것은 천녀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입니다.
쾌락을 쫓는데 몰두하다가 갑자기 죽는 이들은 불선한 업의 충격파로
지옥에 떨어지기 쉬운 운명이기 때문에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어떤 조짐이 보이면 두려움이 일어나
그들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쾌락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은 비단 욕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괴로움은 무색계의 범천들의 운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범천계에는 성적인 쾌락이나 다른 감각적 쾌락이 없습니다.
범천들은 그저 보고, 듣고, 생각하기만 할 뿐,
그들이 보고 듣는 대상들에는 성적인 연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청정도론에 나와 있듯이 일부 사람들은 소문이나 추론을 통해서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은 인간계와 천신계의 감각적 쾌락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궁극적인 색계 범천계나 무색계 범천계에 태어나게 하는
색계선, 무색계선을 증득하도록 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말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범천계의 감각적 쾌락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관념을 부정하겠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호소력이 있을 것입니다.
인도의 종교서적들은 범천을 아내와 같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열반을 자신의 가족, 시종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천상의 궁전이 있는 극락세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감각적 욕망에 대한 모든 집착은 갈애를 뜻합니다.
단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지나친 갈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색계, 무색계의 확장된 형태의 갈애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자는 성스러운 도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비로소 이 지나친 갈애를 없앨 수 있고,
이 갈애는 색계 선과 무색계 선을 얻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바로 그 갈애인 것입니다.
범부에게 있어 그러한 선정은 감각적 쾌락에 토대를 둔
색계나 무색계의 업의 노력을 뜻하며
이는 색계 범천이나 무색계 범천계에 태어나게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순간부터 정신과 물질이나 삶의 두 현상 중에
어느 하나의 끊임없는 늙음이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범천이 늙는 것은 사람이 늙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쇠퇴해가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 진행이 끝나면 범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범천의 삶은 슬픔, 근심, 걱정 등을 겪지 않습니다.
또한 몸에 감성의 물질이 없기 때문에
범천은 육체적인 고통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범천도 모든 유형의 존재에 내재해 있는
태어남, 늙음, 죽음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늙음과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재생의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재생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선업과 불선업을 비워야하고
집착과 갈애를 부르는 업의 생성을 거부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정신적 과정을 반드시 느낌으로 끝내야 하고
무언가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하는데 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각장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는 알아차림을 통해서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갈애, 재생, 늙음, 죽음에 이르는 원인과 결과의
다른 연결고리를 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는 성스러운 도에서 수행자가 위빠사나의 지혜를 계발하였을 때
일거에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괴로움의 일시적 소멸을 뜻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잠시 부처님의 전생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생담에 나오는 부처님의 어느 전생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어느 전생에서 왕자로 태어나서 얼마 후에 왕이 되신 적이 있었습니다.
왕이 되신 후에 왕궁을 버리고 사무량심인 자비희사를 닦으면서 지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왕비의 마음에 좋지 않은 징조가 떠올랐습니다.
나쁜 징조를 본 왕비는 왕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왕비가 왕을 보았을 때 왕은 죽음이 가까워졌어도
사무량심과 함께 생활을 하던 중이었으므로
그의 얼굴은 고요하고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왕국의 백성과 나를 측은히 여겨 절대 돌아가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왕이 왕비에게 말하였습니다.
‘나에게 더 이상 갈애를 일으킬 만한 말을 하지 마시오.
내가 당신과 백성을 측은히 여겨서 갈애와 함께 죽는다면
갈애를 원인으로 마음에 집착이 생기고 집착을 원인으로 불선한 업을 짓게 됩니다.
이 업과 함께 죽으면 나쁜 곳에 태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죽을 무렵에 원하는 마음, 즉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면
좋은 곳에 가지 못하고 나쁜 곳에 태어나게 되니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을 때 자신의 아내, 남편, 딸, 아들, 재산, 자신의 몸 등을
좋아하여 집착하는 마음으로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마음이 떠나지 못한 채 집착하는 마음으로 죽는다면,
결코 좋은 생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죽을 때의 마음이 집이나 재산에서 떠나지 않게 되면
갈애로 인해 집착하게 되어서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생을 바꾸게 되는 이 생의 마지막 마음에서 이런 집착을 한다면
결코 좋은 생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축생이나 또는 더 나쁜 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소로 태어날 수도 있고, 염소, 쥐, 닭, 빈대, 물소, 개 등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집안에 있는 벌레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왕은 왕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비시여, 부디 나에게 갈애를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말고 갈애를 제거하는 말을 해 주시오.’
이렇게 말하자 왕비는 두 손을 모으고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이 왕국과 저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수행을 하시면서 죽음을 맞이해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의 전신인 왕은 ‘사두, 사두, 사두’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는 ‘선재, 선재, 선재’ 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상은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가 되기 전까지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바라밀 공덕을 쌓거나 사마타 수행만 하십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인 사무량심 수행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제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은 스스로 노력하여 번뇌를 불태우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 중에서 오직 인간만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은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의무입니다.
번뇌를 해결하려는 의무를 다하지 않고 행복할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간에게만 부여된 특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항상 열심히 수행해서 우리는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야합니다.
비록 우리가 부처는 되지 못할지라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어서
이 고통뿐인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답하는 제자로서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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