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묘원입니다.
위빠사나는 싸워서 이기는 수행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을 받아들여서 아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르는 마음이며, 받아들이면 아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수행이란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하는 것만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관용으로 이러한 선한 행위가 없으면 의식이 고양되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면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중도가 됩니다.
중도의 마음에서만 대상의 바른 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 나타나던 싸우지 말고, 인내하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나라고 하는 자아를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이래서
궁극의 법을 보지 못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진심(瞋心)은 화를 내는 마음입니다.
진심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는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진심이라고 할 때의 이 ‘진’자는 눈 부릅뜰 ‘진(瞋)’입니다.
성내는 마음은 하나지만 여러 가지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성냄은 타락, 부패, 결점, 잘못, 병의 바탕이 되는 마음입니다.
성냄은 화, 분노, 혐오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며,
피하고, 없애려 하고, 질투, 후회, 인색한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탐심, 진심, 치심은 불선심의 세 가지 독이라서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불선심은 반드시 불선행을 하여 그에 따른 불선 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알아차려서 이러한 불선의 과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탐욕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네!’ 라고 알아차려야 하며,
화를 낼 때는 ‘화를 내고 있네!’ 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리석다고 알았을 때는 ‘어리석었네!’라고
단지 그렇게 알아차리고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12연기의 맨 끝인,
생을 원인으로 노사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저희는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그 끝부분인 마지막 생을 원인으로 노사가 일어나는 곳 까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업에 생성을 원인으로 미래의 태어남이라고 하는 생이 일어나면
다시 생이 원인이 되어서 노사라는 결과가 생깁니다.
태어난 이상 늙어서 죽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생이라고 하는 태어남은 그것 자체가 괴로움의 시작입니다.
태어난 생명이 모두 악조건 하에서 제대로 생명을 유지하기도 힘들며
생명을 유지했다고 해도 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바르게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태어남 자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에 태어남을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라고 합니다.
이처럼 태어남은 부인할 수 없는 엄숙한 진실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로병사라 하는데 12연기에서는 생과 노사만 있지 병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생로병사라고 말합니다.
병은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있는 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사실 정신과 물질은 병의 먹이이며 죽음의 먹이입니다.
나무가 있는 한 벌레가 있듯이, 정신과 물질이 있는 한 병과 죽음이 뒤따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과(因果)의 사슬에서 무명은 행을 일으키고, 다시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납니다.
이 때 정신과 물질이 형성됩니다.
이렇게 생긴 정신과 물질은 감각접촉을 일으킵니다.
감각접촉으로 느낌이 일어나고, 이 느낌이 다시 갈애를 일으킵니다.
느낌이 즐거운지 괴로운 것인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반면
괴로운 느낌은 즐거운 대상들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갈애가 강해지면 광적인 갈애인 집착으로 발전하고,
그러면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나 노력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선행이나 악행을 합니다.
재생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갈애를 기반에 둔 업의 생성입니다.
재생이라는 새로운 태어남은 어느 중생계에서 일어나든 간에 괴로움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축생계와 다른 악처의 괴로움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계에서도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삶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람의 괴로움은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태어난 다음에는 먹고 살기위해 힘들게 일해야 하고 악당과 폭군에 시달립니다.
설사 생존경쟁에 내재해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늙음, 병듦, 죽음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태의 순간부터 사람은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삶의 괴로움을 향해 갑니다.
매 순간마다 사람은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 한 발 한 발 다가섭니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 걱정이 없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의 정신과 물질은 언제나 늙음과 죽음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늙음, 병듦, 죽음의 불가피함을 강조하는 인도의 설화가 있습니다.
한 사내는 늙음을 두려워하여 불로장생의 약을 입에 넣고
허공으로 올라가서 하늘에 숨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병듦을 피하기 위해서 바다 속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내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히말라야의 동굴에 숨었습니다.
세 사내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찾아 나섰는데
첫째 사내는 아주 추하게 늙어 있었으며
둘째 사내는 병들어 죽어 있었고
셋째 사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일단 태어나면 이러한 존재의 괴로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건, 땅이건, 바다 속이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람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릇은 왜 만들어졌습니까?
그릇은 깨지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회사는 왜 생겼습니까?
회사는 언젠가 없어지기 위해서 생겼습니다.
왜 우리가 만납니까?
우리의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은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과연 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죽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으려면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갈애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갈애를 일으키면 집착을 해서 업을 생성해서 미래의 태어남을 원하기 때문에
다시 죽어야 하는 끝없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무너지고야 말 정신과 물질의 테두리 안에서
재생이 일어나는 한 죽음과 다른 두 가지의 삶의 괴로움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재생은 슬픔, 근심, 탄식 번민에 이릅니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이 죽을 때 슬퍼합니다.
우리가 끔찍이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을 잃었을 때에도 슬픔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아내나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그 슬픔을 무엇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슬픔의 원인은 못된 관리, 강도, 도둑, 화재, 홍수, 태풍, 가증스런 상속자들로 인해
재산을 잃는 것입니다.
또한 슬픔은 질병에 시달리고 건강이 나빠지면 일어납니다.
어떤 환자는 너무 의기소침하여 회복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도덕적으로 양심적인 비구와 재가자의 경우 계행이 훼손되면 근심을 합니다.
그래서 알람부사 본생경에 나오는 선인 이씨시잉카는 자신의 청정한 계행이
한 천녀의 유혹으로 훼손되자 극심한 번민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릇된 스승의 지도 속에서 삿된 견해에 찬동하여 바른 견해를 저버린 뒤에
자신의 잘못은 깨달은 사람들의 근심과 후회도 고통스럽습니다.
사실 앙굴리말라도 매우 선한 사람이었지만
스승의 잘못된 꼬임에 빠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선한 과보를 받아서 아라한이 되는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슬픔, 번민, 탄식을 일으키는 사고, 강도에 의한 고통,
생계를 꾸려나가고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 어려움과 같은
다른 많은 삶의 불행도 있습니다.
지옥 축생 아귀계의 육체적 고통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도 괴로운 감각대상과 맞부딪힐 때마다 고통에 휩싸입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사실 저희 명상원에 오시는 분들에게 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요새 어떻게 먹고 사느냐?
먹고 사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 한 몸 누일 곳, 이 한 몸 입을 것, 이 한 몸 먹을 것이 그렇게 생각처럼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모두 고통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질문하기도 합니다.
숨 쉬는 거 봤어요?
이 질문은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통만 한탄하지 말고,
그 순간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지켜봄으로서 고요함을 얻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라한이나 아나함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평온합니다.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이 없는 사념처 수행자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괴로운 느낌으로 고통을 받을 때
그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겪었고, 현재 겪고 있는, 또 미래에 겪을
좌절과 불행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곤경에 처해 있고 불행에 눌려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가슴이 아프고 심란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모두 태어남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삶이란 자아가 없는, 설령 즐기는 그러한 자아가 있다 해도,
즐길 만한 좋은 것이 없고 모두 괴로움인 것입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한 생이 다른 생과 연결되는 유일한 고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고 합니다.
한 생의 무명에 토대를 둔 갈애, 업의 노력 등에서
식과 정신과 물질과 여섯 가지 감각 장소, 감각 접촉, 느낌의 다섯 가지 과보가 생깁니다.
이것이 오온입니다.
이러한 과보는 재생으로 시작하여 늙음과 근심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다른 괴로움을 거쳐 결국에는 항상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행복과 자아가 실재한다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보통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와 괴로움은 틀림없이 존재의 현실로 천인계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부 땅에 붙어사는 아귀는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므로 사람보다 더 비참합니다.
그들을 위니 빳디카 천인이라고 하는데 낮은 천인의 부류에 속하는
아귀나 악령 따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늘의 어떤 천인들은 거처도 좋지 않고 시종들도 많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천상이라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무료함이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천인들의 왕인 제석천조차도
불법이 선포되기 훨씬 전에 선업으로 천인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은 그다지 빛나지 않는 것과, 부처님 시절에 선업을 쌓아서
자기보다 더 빛나는 천인들을 보면 숨어 버릴 수밖에 없다고
까삿빠 장로에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상을 다스리는 제석천왕도 수다원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수다원은 괴로움을 끝내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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