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94

通達無我法者 2011. 1. 29. 22:5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교육은 필요한 것이지만 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교육을 한다는 명분으로 화를 내는 것은 비교육적이며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화냄을 당한 사람은 개선되기 보다도 증오를 키우게 되어 오히려 더 나빠집니다.

화냄을 당하면 그것을 면죄부로 생각하고 절대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나의 화는 상대를 화나게 화며 상대의 화가 다시 내게 증오로 돌아옵니다.


상대의 잘못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주면

나의 마음이 편안해져서 상대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화는 비도덕적인 마음에 기초한 불선이므로

오직 선한 마음으로 대할 때만이 교육의 효과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상대가 자신에게 화를 낼 때 꼭 나 때문만은 아닙니다.

누구나 화를 낼 때 한 가지 이유만으로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화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해서 일어납니다.

누적된 불만이 쌓이게 되면 화를 내게 되고,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면 화를 내게 됩니다.

화는 이기심과 열등의식이 작용할 때도 일어납니다.


화를 내는 원인은 많지만

가까운 원인은 탐욕이고, 더 가까운 원인은 화가 화를 내게 합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근본 원인은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화에 걸려 나도 화를 내면 세속에 사는 것이고,

상대가 화를 내도 내가 걸리지 않으면 출세간에 사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번뇌를 즐기고 출세간에서는 번뇌를 끊습니다.

이처럼 세간과 출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화를 낼 때 함께 화를 내면 무지의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화를 분리해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맞서면

지금도 화를 내고 앞으로도 계속 화를 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화를 내는 사람이 가야 되는, 지금 이후와 다음 세계는 이미 결정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부처님의 전생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오늘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수행하시는 과정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부처가 되기 전의 보살은 도솔천에서 생을 마친 후

까삘라왓뚜의 숫또다나왕의 정실왕비인 마하 마야떼위의 태내에 들어갔습니다.

보살은 보름날 금요일에 룸비니 숲 사리나무 즐거운 숲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싯달타라고 하였습니다.

16살에는 테와다의 왕족인 숩바붓따의 딸 야소다라데위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4만 명의 궁녀들에 둘러 싸여 장엄한 궁전에서 왕궁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싯달타는 화려함과 장엄속에서 감각적 즐거움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정원의 향연과 환락을 위해 시중을 데리고 왕실의 즐거운 숲으로 나아갔습니다.

숲으로 가는 길에 그는 노쇠한 늙은이를 보고 충격을 받아 왕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프고 병든 사람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왔습니다.

또 세 번째 밖에 나갔을 때는 죽은 사람을 보고 마음이 크게 동요하여

급히 왕궁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보살은 이렇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면 늙어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내와 자식, 노예 ,염소와 양, 닭과 돼지, 코끼리, 말, 가축, 금, 은,

유정물, 무정물, 쾌락과 호화, 이 모든 대상은 늙도록 되어있다.


스스로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그런 쾌락에 둘러싸여 파묻혀 지내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병들고 죽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병들고 죽어가도록 되어 있는 감각적 대상을 갈구하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다.

늙음, 질병, 죽음과 같이 어울리지 않고 타당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저속한 일이다.


스스로 병들고 죽어가도록 되어 있는데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은 성스러운 추구이다.

이렇게 보살은 사유했습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살이 처음에 세속적인 것에 빠져있었던 것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에는

나 스스로 태어나도록 되어 있었는데도 역시 또 태어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원하였다.

나 스스로 늙어가도록 되어 있었는데도 역시 또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원하였다.”


이는 쾌활한 궁녀들 무리 속에서 야소다라와 함께 살았던 시절,

쾌락을 추구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다음,

태어남, 늙음, 질병,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반의 평화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스스로 태어나고 늙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불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태어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비할 수도 없고 능가할 수도 없는 

열반의 평화를 찾는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


이렇게 해서 보살은 늙음과 질병, 죽음이 없는 열반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목표였으며 우리는 그것을 좀 더 고찰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나이 들고 노쇠한 어떤 사람이 자기처럼 나이 들고 쇠약한 다른 남자나 여자를 찾거나,

아직 나이는 들지 않았어도 곧 늙어버릴 누군가를 짝으로 찾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전혀 사려 깊은 일은 아닙니다.


또 건강이 나빠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린 다른 사람을

짝으로 구한다면 너무나 불합리한 일일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건강이 좋은 상태에 있더라도 곧 병고를 받게 될

그런 사람과 짝을 이룬다는 것은 사려 깊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고 정착해서

즐기면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배우자 중 한 쪽은 곧 병으로 몸져눕게 되고

다른 짝이 돌봐 주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됩니다.


배우자 중 한 쪽은 죽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슬픔과 비탄만 남겨주며

행복한 결혼생활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결국 부부는 늙음과 질병 그리고 죽음이라는 불행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어가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가장 성스러운 것은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바로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출가를 해서 비구, 비구니가 되어서 수행을 하는 경우는 매우 뛰어난 선택입니다.

그러나 재가자로 살면서 결혼을 하고 바라밀 공덕을 쌓으면서

수행을 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는 사실은 두 사람이 하나의 결합입니다.

두 사람의 결합은 각기의 영역이 하나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역이 하나로 되는 것은 결코 상대편의 영역을 무시하는 그러한 하나가 아닙니다.

남편의 50%, 아내의 50%가 합쳐진 100%여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의 몫은 50%만 주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50%는 아내의 몫으로, 상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 두 부부가 살다가 한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재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또 다른 감각적 욕망의 하나의 선택이라고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겠습니다.

마치 재혼을 하지 않으면 삶이 고단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를 위해서 헌신했던 그 50%를 이제 온전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돌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매우 고결해 질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기울였던 헌신적 노력을 자기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수행을 한다고 한다면

그는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살이 즐거운 숲으로 네 번째 유람을 나갔을 때, 한 출가사문과 마주쳤습니다.

세속의 삶을 버리고 공덕을 쌓는 것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문의 말을 듣고

보살은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사문이 되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서리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얻으면 그 지혜를 세상에 전해 주어

다른 중생들에게도 늙음, 질병, 죽음이라는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생각과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날, 거의 같은 시각에 야소다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보살은 ‘장애가 태어났구나, 족쇄가 태어났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라훌라입니다. 라훌라는 장애를 뜻합니다.


이 말을 들은 보살의 아버지 숫또다나 왕은

이 아이가 실제로 보살에게 족쇄가 되고

출가하고자 하는 계획에 장애가 되기를 바라서

새로 태어난 손자를 라훌라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보살은 세속의 즐거움을 싫어하게 되어

그날 밤 왕궁 무용수들이 제공하는 여흥에도 동요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았으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낙심한 무용수들은 악기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한 밤중에 잠을 깬 보살은 기대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보고 혐오감을 느꼈고,

장엄한 궁전이 마치 송장들로 가득한 공동묘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한 밤중에 마부인 찬나를 데리고

왕궁의 전속 말인 칸다까라는 말을 탄 채 출가를 감행했습니다.

그들이 아노마 강에 이르렀을 때 보살은 모래강변에 선채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왕의 장신구를 버리고 주황색 가사를 걸쳐 입고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때 보살은 겨우 29이었고 쾌락을 추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이였습니다.

아직도 한참 젊음을 누릴 나이에 왕궁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야소다라 비와 시종들이 주는 쾌락과 편안함을 버리고 출가한 것은

참으로 경외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부처가 되신 뒤에

붓다께서는 괴로움뿐인 윤회를 끝내고 해탈을 이루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 우리는 부처님이 가신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역대 모든 부처와 모든 아라한과 모든 성자들이 가신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다시 태어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께서 가신 이 길은 죽음에 이르러 모든 갈애가 소멸되고,

원인과 결과가 소멸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길입니다.

이것이 해탈의 길입니다.


그렇지 않고 죽을 때의 마음에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다시금 윤회를 해서 새로운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 까지 우리는 이 끝없는 윤회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때로는 지옥으로, 때로는 인간으로, 때로는 천상으로, 때로는 축생으로 태어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해서 그 선한 과보로

지고의 행복인 열반을 선택하려는 노력을 함께 하셔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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