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01

通達無我法者 2011. 2. 12. 20:0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운 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괴로움을 대체하는 유일한 대안은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괴로움으로부터 도피하면 영원히 괴로움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괴롭다고 감각적 쾌락을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감각적 쾌락은 일시적인 최면 효과만 있을 뿐입니다.


괴로움을 죽음으로 대체하지 마십시오.

자살은 살생으로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자살로 결코 괴로움이 끝나지 않습니다.

자살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입니다.

자살을 하면 다시 태어나서 더 가혹한 과보를 받습니다.


괴로움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 괴로움은 한 순간의 느낌일 뿐입니다.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지켜보십시오.

그것이 과연 누구의 괴로움입니까?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나의 괴로움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느낌일 뿐입니다.


느낌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괴로움도 일어난 순간에 이미 사라졌는데

단지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서 또 괴로움을 일으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제 11장을 계속 공부해 보시겠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보시는 유익한 행위인 선업입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 욕망은 갈애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업은 하얀 업과 검은 업이 뒤섞인 업이 됩니다.


즉 유익한 행위인 선업은 하얀 업이며,

다음 생에 보다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욕망은 검은 업이기 때문에

이것을 일러 뒤섞인 업이라고 합니다.

잠시 뒤섞인 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뒤섞인 업을 혼합 업이라고 합니다.


보시는 선업이지만 갈애는 꼭 선업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갈애는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에 따라서 순수한 선업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보시의 업과 무엇인가를 바라는 갈애의 업은 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함께 있을 때는 두 가지가 혼재해 있는 것입니다.

혼재와 혼합은 다른 것이지만 편의상 혼합이라고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선업과 불선업은 섞이지 않습니다.

선업은 선업의 과보를 받고 불선업은 불선의 과보를 받습니다.


불선업에 의해 불선의 과보를 받을 때

고통 속에서 계속 비참한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받은 불선의 과보에 새로운 불선업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선업에 의한 선과보가 작용하여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수행을 한다든가 다른 선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업을 만들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뒤섞인 업으로 인해서 얻은 이익은

용왕이나 고귀한 흰색 코끼리나 왕족 등으로 태어나게 된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수행자들은 이렇게 뒤섞인 업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그렇지 못한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눈먼 자의 걸음을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로 걷는다는 것은

공덕을 짓는 행과 공덕이 없는 행을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른쪽 다리로 걷는 것은 인간이나 천인의 오온을 얻게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의 진리일 뿐입니다.

왼쪽 다리로 걷는 것은 비참한 존재계의 오온을 얻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인간이나 천인으로 태어나게 하는 오른쪽 다리로 걷는 것이나

사악도에 떨어지는 왼쪽 다리로 걷는 것이나

똑 같이 윤회의 세계 안에서 생사를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다리로 걷고 있다는 것은

연기의 순환을 거듭하는 것이며 윤회가 계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끝없는 고난의 길을 두 다리로 걷지 않는 것이

열반을 의미하며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윤회를 끝내고자 하는 마음은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통찰했을 때 필요한 지혜입니다.

아직 이러한 지혜가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수행을 통해서만이

단계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리하여 눈먼 범부는 방향도 없이 걸으며 도달하는 곳도 없습니다.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은 무지와 함께 이루어져 연기의 길을 걷게 될 뿐입니다.


자! 다시 도표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과정을 봅시다.


12연기를 보면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고

다시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납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수차 말씀 드렸듯이 여기에서 식은 재생연결식을 의미합니다.


눈먼 자가 걸어갈 때 그는 태어남이라는 괴로움의 구덩이에 빠져 넘어진 것입니다.

태어남을 얻으면 재생연결로 인하여 온갖 종류의 괴로움도 함께 얻게 됩니다.


이 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때의 태어남이 환생이 아니고 새로 태어나는 재생입니다.

정신과 물질은 매 순간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9개월간 오줌과 똥 사이에 무릎을 구부린 채

발꿈치 하나 제대로 뻗을 공간도 없이

온 몸이 눌려서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을 원인으로 식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현생의 시작인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식을 원인으로 명색이 일어납니다.

이는 태어남으로 인해서 정신과 물질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눈먼 자가 굴러 떨어져서 상처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눈 먼 사람이 넘어질 때

그저 보통으로 가볍게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곤두박질치듯이 넘어져서 몸을 다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생성되는 정신도 상처이며 물질도 상처이고

이것이 바로 괴로움과 불만족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집착하는 오취온은 괴로움입니다.

오온은 그 자체가 괴로움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흔히 오온이라고 말하는 색, 수, 상, 행, 식은 다섯 가지 무더기를 말하는데,

이 다섯 가지 무더기를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생각해서 우리는 오온을 집착합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오온을 우리는 오취온, 집착하는 오온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운 것입니다.


다음에 명색을 원인으로 6입이 일어납니다.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위에서 받은 상처를 비유로 계속해서 보자면

이제 그 상처는 전염성이 있어 온 몸으로 퍼져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눈이라는 상처, 귀라는 상처, 코라는 상처, 혀라는 상처,

몸이라는 상처와 마음이라는 상처가 됩니다.

이것이 명색을 원인으로 육입이 일어난다 입니다.


그러니까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에서 여섯 가지의 상처가 나서

그 상처를 통해서 고통이 들어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은 상처이고, 병이며, 학질이고, 따끔거리는 가시와 같은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바른 견해입니다.


다음에 6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일어납니다.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눈이 있기 때문에 보는 기능을 해야만 합니다.

귀가 있기 때문에 듣는 기능을 해야만 합니다.

코가 있기 때문에 냄새 맡는 기능을 해야만 합니다.

혀가 있기 때문에 맛을 보는 기능을 해야만 합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닿음을 아는 기능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하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대상과 감각기관의 부딪침이 있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탐욕과 성냄과 그리고 정신적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덤덤함이 함께 일어납니다.

이는 마치 눈먼 자가 길을 걷다가 발을 잘못 내디뎌 비틀거리고 넘어져서

다치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6입으로 인하여 접촉이 일어난다는 것은

눈먼 자가 다시 가시에 찔려 상처가 나고

그 상태가 더욱 나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 눈먼 자는 심하게 넘어집니다.

고통도 심합니다. 괴로움도 심합니다.

이러한 심각함이 바로 무명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명을 우두머리로 하고 갈애를 동반자로 하여

범부는 갈애가 시키는 대로 갖은 악행을 저지릅니다.

결국 괴로움의 원인인 집제로 인하여 괴로움인 고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목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무명을 우두머리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갈애를 동반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를 이고, 지고, 메고, 들고, 안고, 함께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실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무명과 갈애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과보의 굴레가 번뇌의 굴레를 일으켜서

번뇌의 굴레가 업의 굴레를 일으키고

그 업의 굴레가 다시 과보의 굴레를 일으키는 그러한 순환을 말합니다.

이러한 순환의 핵심 축은 항상 무명과 갈애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윤회의 과정에서 오로지 불만족과 괴로움의 무더기가 있을 뿐입니다.

더 나아가 눈먼 자가 가시에 찔리면 그 결과로써 느낌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납니다.

느낌은 대상과 감각기관과 의식이라는 세 가지 현상의 부딪침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느낌은 보이는 대상이 있을 때, 소리가 들릴 때, 냄새를 맡을 때, 음식을 먹을 때,

몸에 닿을 때, 그리고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항상 일어납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한 96가지의 질병에 시달리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도표 부분 2의 전 과정인 오온이 괴로움의 진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무명이 지혜가 될 때만이 우리는 괴로움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혜안이 일어났다. 지혜가 일어났다. 밝음이 일어났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명의 어둠에서는 볼 수가 없지만

지혜의 밝음에서는 진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범부가 아닌 지혜를 가진 자의 눈에는

연기를 탈출하는 그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명과 갈애를 없애는 그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길이라는 것이 바로 무명과 갈애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다시 눈먼 자의 경우를 봅시다.

고통을 덜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는 약을 찾을 것입니다.

약을 찾으려 아무리 애써도

눈먼 자가 적절한 치료약을 우연히 찾아내기란 매우 힘듭니다.


무명에 덮이고 진리에 대해 무지한 자가

적절한 치료약을 찾아낼 그런 진리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기나긴 윤회의 여정에서 치료약을 찾기 위한 시도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과거생과 마찬가지로 이번 생에서도 실패를 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또 도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들이 과연 윤회의 여로에서

우리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정해졌습니다.


고통뿐인 이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지금 이 순간의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려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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