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02

通達無我法者 2011. 2. 12. 21:0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장애는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갖가지 장애가 생기고 마음이 잠시도 대상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망상, 통증, 졸림으로 집중하기가 어려우면 이런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이란 잘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난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관용과 자애와 지혜가 생기게 되지만

없애려고 하면 괴로움이 커져 수행을 포기합니다.


모든 장애는 단지 알아차릴 대상이며 그래서 법입니다.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이므로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장애는 장애가 아니고 항상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손님은 내칠 대상이 아니고 맞이해야할 대상입니다.


수행 중에 생기는 장애는 밥상에 반찬과 같은 것입니다.

장애를 알아차리면 반찬을 먹어 그릇을 비우는 것입니다.


장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내면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므로 법이라고 합니다.

장애는 이미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진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장애는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실패도 장애이며 성공도 장애입니다.

실패나 성공이나 괴로움이나 즐거움 그런 것들은 단지 대상입니다.


장애를 없애려고 하면 더 커지므로 대상으로 봐야 합니다.

장애가 있어 발전할 수 있으므로 장애는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스승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교재 제 11장

‘연기의 길을 따르는 자는 눈먼 자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를 계속해서 공부하시겠습니다.

교재 8쪽에 있는 도표를 참조하겠습니다.


12연기의 도표 부분1은 과거의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이런 과거의 괴로움의 원인으로 인하여 부분2의 현생의 모든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으로 인해 괴로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괴로움의 원인으로 인해 현재에도 괴로움이 상속되었는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선한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서

미래에 이 괴로움이 상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괴로움의 원인도 모르고 현재의 괴로움도 자각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미래에도 괴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괴롭다는 것은 불만족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괴로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거움을 만족할 수 없어서 더 큰 즐거움을 원하기 때문에 불만족인 것입니다.


현재의 존재는 과거의 무지와 갈애와 집착과

그리고 업과 현생의 물질적 자양분의 원인으로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다섯 가지 원인 때문에 현재의 존재가 생겼다면

무지와 갈애와 집착과 태어날 업을 형성하지 않으면

현생의 물질적 자양분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도 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과거의 원인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차츰 지혜가 나서

내가 없고 단지 원인과 결과만 있다고 알아서 무지가 지혜로 바뀝니다.


그러면 갈애와 집착과 업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린 결과로 무아를 아는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무아를 알기 까지는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무아를 알기 전까지는 완전한 소망을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빨리어로 ‘둑카’ 라고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고(苦)’ 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의 뜻은 불만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빨리어의 뜻과 가깝습니다.


그러나 ‘둑카’ 라고 하는 빨리어를 더 정확히 살펴보면

빨리어의 ‘두’ 는 어렵다는 뜻이고 ‘카’ 는 참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둑카’ 라는 빨리어의 합성어는 참기 어려운 것이라는 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는 ‘두’ 는 하찮은 것이라는 뜻이고 ‘카’ 는 비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둑카’ 라고 하는 괴로움은 사실 하찮고 비어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찮고 별 볼일 없이 속이 빈 것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하찮은 것을 하찮지 않게 보고 별일이라고 보아서

‘둑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일은 사실 하찮은 것인데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아가 없어서 어떤 실체도 없는데

자아가 있다고 알아서 비어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상을 관념으로만 보지 실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이 아닌 실재인

몸과 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진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부라서 큰일을 포기하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겁니다.


특히 자존심이 그렇습니다.

나는 실재하지도 않는데 자존심을 내세워 화를 낸다면 괴로움이 오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진실은 겉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표피적인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항상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즐거운 느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높은 지위와 많은 수입에 좋은 집과 차를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가 이러한 현재의 위치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갈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으로 인하여 갈애가 일어납니다.


도표를 보면 부분2와 부분3이 다시 연결됩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괴로운 느낌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시 눈먼 자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치료약을 찾고 있는 눈먼 사람이 적절한 약은 아니더라도

어떤 다른 약을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약을 먹거나 바르거나 하여도 결국 상처가 낫기 보다는 악화되기만 할 것입니다.


연기로 보면 이는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일어난다’ 에 해당합니다.

집착으로 인하여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세 가지 업이 일어납니다.


그는 보시를 할 때마다 내세에 보다 부유한 이가 되거나

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아들과 딸, 아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온 가족이

미래 생 내내 함께하기를 기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성제에 대해 무지한 보통 사람들이 행하는 그릇된 행위의 예입니다.

이는 넘어져서 상처가 나고 곪은데다가 가시에 찔리기까지 해서

치료약을 구하더라도 결국 잘못된 약을 얻게 되는 눈먼 자의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성제에 대해 알지 못하고 윤회의 여정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연기에 의해 윤회의 소용돌이 속으로 더욱 더 휘말려 들어갈 뿐입니다.

그는 올바른 길에 대한 진리인 팔정도를 전혀 모릅니다.


팔정도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잠시 사성제 중에서 도성제인 팔정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팔정도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의 고집멸도 중에서 도제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팔정도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합니다.

팔정도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바른 길입니다.


팔정도는 지성을 나약하게 하는 고행을 하지 않고

정신적 발전을 퇴보시키는 탐욕을 일으키지 않는 중도의 길입니다.

팔정도의 바른 길로서만이 열반의 소멸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정도 없이는 도과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팔정도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길이며 행복으로 가는 가장 고귀한 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불교의 팔만 사천 법문을 줄이면 37조도품이고

다시 37조도품을 줄이면 8정도입니다.

이 8정도를 요약하면 계정혜 삼학입니다.

다시 이 계정혜 삼학인 계율과 집중과 지혜를 줄이면 알아차림 하나입니다.

바로 이 알아차림으로 중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팔정도와 계정혜와 중도와 위빠사나는 동의어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요약하면 12연기와 사성제입니다.

다시 사성제와 팔정도가 두 가지 원리로 요약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성제는 교학의 측면으로 볼 수 있으며

팔정도는 규율의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는 팔정도를 포함하고 팔정도는 사성제를 포함합니다.


팔정도는 바르게 살아가는 규율의 측면에서 볼 때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들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하나의 전선 안에 여덟 가지의 가닥들이 모여서 포함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하나씩 독립된 선행들이지만

여덟 가지가 모여서 큰 선행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나눌 때 지혜를 중요한 덕목으로 봅니다.

이 지혜는 정견과 정사유라는 혜(慧)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순서로 보면 계율과 집중과 지혜로 나누지만

팔정도에서는 정견과 정사유라는 혜가 앞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먼저라는 것은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팔정도의 정을 한문으로는 ‘바를 정(正)’ 자로 쓰는데

빨리어로는 ‘삼마’ 라고 합니다.


‘삼마’는 올바른, 완전히, 원만히, 적절하게, 정확하게,

철저하게 라는 많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빨리어에는 ‘삼마’ 와 함께 ‘삼(sam)’ 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삼’ 이라고 하는 정(正)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르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정확하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바르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전체로서의 뜻이 있습니다.

전체로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정신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모든 현상을 전부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평등하게’ 라는 뜻이 있으며 ‘고르게’ 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다섯 가지 기능이 고르게 균형을 잡아야합니다.

이것이 믿음, 노력, 알아차림, 집중, 그리고 지혜입니다.

이들 다섯 가지가 평등하고 고르게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한문으로 바를 정자를 써서 바르게라는 뜻만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이 세 가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정(正)이라고 하는 것은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견해라고 할 때는 알아차림이 있는 견해라는 뜻으로도 사용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팔정도의 첫 번째는 정견입니다. 정견을 바른 견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알아차림이 있는 견해라는 뜻입니다.

알아차림은 깨어있는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정견은 올바른 지혜에 속합니다.


정견은 고집멸도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도 괴로움이 있는 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괴로움의 소멸이 열반인지도 모르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팔정도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성제를 알아야 비로소 바른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견은 고집멸도에 대한 바른 앎을 말합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로 볼 때라야 비로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의 지혜가 있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팔정도의 두 번째 정사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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