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03

通達無我法者 2011. 2. 12. 21:1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남이 말하면 듣고, 물으면 대답하고, 좋은 말은 하면 받아들이십시오.

말은 자신을 몰락시키거나 흥하게 하며, 남을 돕거나 해치기도 합니다.


상대가 선하지 못한 말로 비난해도 그냥 들어야 하거늘

하물며 선한 의도로 말한다면 어떤 충고라도 받아드려야 합니다.

상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예 조언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언을 구할 때는 어떤 말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남이 자신을 비난할 때 그 비난은

비난한 자의 말일 뿐이지 결코 자신의 말이 아니므로

남의 비난에 반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나를 비난할 때 견디기가 어려우면

비난하는 자에게 마음을 보내지 말고

자신의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대상으로 주시해야 합니다.


어떤 상대가 되었건 자신의 말에 그대로 따라 주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듣는 자의 결정은 듣는 자의 몫이므로 남의 결정에 개입하지 마십시오.


선한 것이나 선하지 못한 것이나 모두 가속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말하는 것에도 가속도가 있어서 한 쪽으로 말을 자꾸 하게 됩니다.


말을 해야 할 때 말하지 않고,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을 하면

스스로가 격을 낮추는 것이므로 천박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허물이 아닙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만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자신이 말할 때는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자신이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알고,

그리고 상대의 표정까지 읽으면서 말하면 훌륭한 말이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팔정도의 두 번째 정사유(正思惟)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사유는 바른 생각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이것은 바른 겨냥입니다.

이것도 알아차림이 있는 사유이기 때문에 지혜에 속합니다.


뜻으로 본 정사유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욕심으로부터 떠난다는 이욕(離慾)입니다.

이 이욕은 세속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집착과 이기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심 대신에 이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정사유의 두 번째는 화를 내지 않는 무진(無瞋)입니다.

그래서 미움, 악한 의도, 혐오와 반대되는

자애와 선한의도와 상냥함을 갖는 것입니다.


정사유의 세 번째는 해로움이 없는 무해(無害)입니다.

무해는 잔인하고 무자비함과 반대가 되는 해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정사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사유는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사유는 알아차림이 있는 바른 사유란 뜻인데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것과 선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

선한 것에 마음을 겨냥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정사유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여러 가지의 대상 중에서 망상을 할 때

망상을 하지 않고 실재하는 호흡에 마음을 기울여서 겨냥하는 것도 정사유에 속합니다.

또, 수행 중에 두세 가지의 대상이 있을 때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겨냥하는 것도 정사유입니다.


정사유를 또 다른 말로는 바른 의도 또는 바른 생각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겨냥이라는 의미가 큽니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정신적 활동의 의도적 관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라는 관점에서는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인식적 측면의 정견과 의도적 측면의 정사유로 구분하셨습니다.

이렇게 지혜도 마음의 기능에 따라서 분류가 됩니다.


수행자가 지혜를 완성함에 있어서 바른 견해 하나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능적으로 바른 사유가 함께 작용을 해야 비로소 지혜가 성숙됩니다.

팔정도의 길을 가려면 나타나는, 선하지 못한 장애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때 선하지 못한 장애에 대항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정견과 정사유입니다.

이것을 지혜가 앞에서 이끈다고 합니다.


평소에 수행을 해서 지혜가 만들어지면

이 지혜가 앞에서 믿음과 함께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항에서 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는 바른 의도가 나게 합니다.

이렇게 상호작용을 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조금씩 부서집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에 속합니다.


다음으로 계율에 관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팔정도는 계율에 관한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입니다.


이것은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직업을 뜻합니다.

이 세 가지는 계 정 혜 중에서 계(戒)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계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戒)는 선하지 못한 행위를 억제하고 선한 행위를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비도덕적인 것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팔정도에서의 계는 윤리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계를 지켜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계를 지켜서 의식의 진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적 진화를 전제로 한 계를 바탕에 깔고

집중을 할 때만이 우리는 궁극의 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계 정 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는 수행의 토대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계는 단지 수단입니다.

이러한 계율이 전제되어야 다음단계의 집중이 가능하며

반드시 이러한 집중을 통해서만이 지혜가 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시작인 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계(戒)가 없으면 들뜨고 안정이 되지 않아 고요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계(戒)는 절제하는 것입니다.

절제함으로써만 정신적 안정과 함께 정신이 계발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제일먼저 계를 지켜 바른 견해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도덕적 바탕에서 바른 견해가 생길 때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비로소 수행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위빠사나 수행에 발전이 없다면

바로 이러한 조건이 성숙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팔정도 계(戒)에 해당하는 세 가지 요소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팔정도의 세 번째는 정어입니다. 정어는 바른 말을 뜻합니다.

정어는 네 가지 요소를 삼가는 것입니다. 그 네 가지 요소 중에

첫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간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거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는 경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솔한 말이란 불필요한 말,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 말로 표현될 땐 이미 업이 따릅니다.

그래서 업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그 과보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생각의 단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다음에 말을 하게 되고

말의 단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다음에 행동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면 더 큰 업을 짓습니다.


말은 행동의 시작이지만 상당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 원수를 만들기도 하고, 말로 동지를 만들기도 하고,

말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말로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바른 말 중에서 거짓말을 삼가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것은 했다고 하며 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의 부정적인 측면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계율의 긍정적인 측면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거짓말은 거짓말한 불선의 과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면 신뢰를 무너지게 하며 가족이나 사회의 단합을 저해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선한 본성이 파괴되고 선하지 못한 본성이 증대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면 의심을 받고 신용이 없어서

정신적 물질적 손실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인 라훌라가

수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법문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이 조금 남아 있는 그릇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라훌라야, 그릇 속에 물이 조금 남아있는 것이 보이느냐?”

그러자 라훌라가 대답했습니다.

“네. 보입니다. 세존이시여.”


“라훌라야. 이와 마찬가지로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문의 성품은 하찮은 것이니라.”


그런 뒤에 부처님께서는 그릇의 물을 바닥에 버린 뒤에

그릇을 다시 내려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라훌라야! 너는 물을 버리는 것을 보았느냐?

이와 마찬가지로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가 성취한 사문으로서의 품성을 버리는 것이니라.

이 그릇이 텅 빈 것이 보이느냐?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문으로서의 성품이 텅 빈 것이니라.”


그런 뒤에 다시 그릇을 뒤집어 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라훌라야! 이 그릇이 뒤집어진 것을 보았느냐?

마찬가지로 고의로 거짓말 하는 사람은 사문으로서의 품성이 뒤집어 진 것이며

그래서 사문의 품성이 향상되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라훌라에게 교육을 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잘못한 라훌라를 혼낸 것이 아니고,

합당한 예를 들어서 가르침을 편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방법이 바른 교육인 것입니다.


사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의 모든 곳에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속속들이 베어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되겠습니다.


정어 중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는 것은

한 곳에서 들은 말을 다른 곳으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간질은 양쪽에게 모두 불화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이간질을 하는 마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이며 계율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간질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칭찬하는 말을 하면

서로가 화합을 하게 하여 행복을 줍니다.

이처럼 이간질을 하는 말은 서로 간에 증오를 부추기고 분열을 조장합니다.

이간질을 하는 배경에는 상대를 비난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성공이나 덕스러운 행위를 시기하여 헐뜯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를 해치는 잔인한 의도라고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간질을 일삼는 것은 이런 잔인한 의도를 스스로 좋아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즐거움 때문에 습관적으로 이간질을 하면

악한 세상에 떨어지는 불선의 과보를 받습니다.


이렇게 좋지 못한 즐거움 때문에 악한 세상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면

이것은 여간 손해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소한 감각적 즐거움 때문에 가장 괴로운 형벌을 받는 다는 것은

결코 이익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간질을 계속합니다.


다음시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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