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42

通達無我法者 2011. 3. 11. 20:3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음식을 제공한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음식을 제공한 사람에게 대한 최고의 보답은

먹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제공한 음식을 먹은 뒤에

그 힘으로 수행을 하면 더 크게 공덕을 갚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기 시작할 때는

먼저 지금 무슨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려 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음식은 배가 부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단지 수행을 하기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음식을 먹을 때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탐욕으로 음식을 먹으려 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먹는다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탐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먹을 음식을 보고 수저나 젓가락을 사용하여 알맞게 집거나 떠서 입에 넣습니다.

음식을 떠서 입에 넣는 동작과 천천히 음식물을 씹은 뒤에 목구멍까지 넘기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음식물의 맛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음식이 아니고 맛의 변화입니다.

음식물을 많이 집거나, 씹지 않고 삼키거나,

씹고 있는 중에 또 다른 음식을 집어넣는 것은 모두 탐욕입니다.


한 가지 음식을 많이 먹는 것도 탐욕이며,

싫어하는 음식을 손대지 않는 것도 성냄입니다.

쩝쩝거리거나 후루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먹으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므로

먹는 예절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22장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맨느낌과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 일어났을 때

언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을까요?


맨느낌의 상태에서 갈애가 일어나기 전에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맨느낌의 상태에서 갈애로 넘어가거나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요?


물론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빨리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답은 언제 어느 때나 알아차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좋다고 하면 빨리 알아차리는 것을 집착합니다.

그래서 늦게 알아차렸을 때는 자책을 합니다.


그러므로 답은 어느 때나 알아차리면 된다가 답입니다.

알아차림에는 늦고 빠른 것이 없습니다.

어느 때고 알아차리면 그것이 가장 빠른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몸과 마음을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느낌은 지금 여기 현재에 있는 실재하는 현상이라서 알아차립니다.

느낌이 단지 느낌으로 남아서 새로운 원인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갈애로 넘어가면 새로운 원인을 일으켜

새로운 결과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느낌을 알아차리면 성자의 길을 가는 것이고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범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자와 범부는 느낌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황금의자는

보리수나무 아래도 아니고, 네란자라 강가도 아니고,

바로 느낌과 갈애 사이에 있는 팔정도 위빠사나 도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히말라야에 간다거나

인도나 미얀마에 꼭 갈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2연기 도표를 보면 2번 칸의 느낌에서 3번 칸의 갈애로 넘어가면

연기가 계속되어 윤회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번 칸에서 3번 칸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냥 느낌으로 있을 때는

열반으로 가서 윤회가 끝나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다.

2번 칸과 3번 칸을 연결하지 않는 길이 바로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즉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맨느낌이 육체적 느낌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만약 알아차리지 못하면 맨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서

집착을 하고 업을 생성합니다.


고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위빠사나 수행자의 이익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수념처 수행을 하는 쉬운 방법을 고안해 내셨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은

앞서 밝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과 동일합니다.


첫째, 6가지 외부 방문자의 느낌들을 알아차립니다.

눈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덤덤한 느낌,

귀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덤덤한 느낌,

코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덤덤한 느낌,

혀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덤덤한 느낌,


몸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

몸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 이것입니다.

이상 6가지의 느낌을 외부 방문자의 느낌들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이런 느낌이 일어날 때 일어난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갈애로 넘어간다면 느낌으로 인해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 의(意)를 뺀 나머지

안, 이, 비, 설, 신, 이라는 5가지 감각기관이

외부의 대상과 부딪혀서 일어나기 때문에

외부에서 방문한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3가지 내부 방문자의 느낌들을 알아차립니다.

의(意)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

의(意)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

의(意)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상의 3가지 느낌을 내부 방문자의 느낌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일으킨 느낌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3가지의 주인의 느낌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즐겁고 기쁜 일, 혹은 유쾌한 상태에서 즐거운 느낌과 함께하는

들숨과 날숨의 느낌,

불만, 고통 혹은 절망의 상태에서 괴로운 느낌과 함께하는

들숨과 날숨의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에서 덤덤한 느낌과 함께하는

들숨과 날숨의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상 3가지의 느낌을 주인의 느낌들이라고 합니다.


이 3가지의 느낌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괴로운 상태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

덤덤한 상태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느낌을

주인의 느낌들이라고 합니다.


사실 호흡은 신념처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호흡도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수념처 수행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호흡은 호흡의 상태에 따라서, 신체적 조건에 따라서 다양합니다.


괴로울 때는 호흡을 하는 것도 잊어버려서 자꾸 한숨을 쉽니다.

격렬한 고통을 느낄 때는 빠르게 호흡을 합니다.

운동을 할 때에도 신체적 조건에 의해 가쁜 호흡을 합니다.

고요할 때는 부드러운 호흡을 합니다.

이러한 호흡을 모두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은 신념처의 대상이기도 하며 때로는 수념처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대상을 신념처로 할 수도 있고, 수념처로 할 수도 있고,

심념처로 할 수도 있고 법념처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호흡 하나에 모든 법의 대상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느낌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곳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가슴이나 머리 부분에서 알아차림을 고정하는 수행이 많이 이루어지는데

느낌은 적당한 때 몸의 어느 곳에서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고정된 곳에서 느낌을 보는 수행을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잘못된 과녁에 화살을 겨누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도 느낌과 계약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아무도 어떤 특정 장소에서 느낌을 고정시켜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접촉하는 과정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느낌이 일어납니다.


만일 수행자가 한순간 지켜본 느낌이 또 다른 순간의 느낌과 똑같다고 여긴다면

그는 아직 수행이 성숙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비구들이여, 느낌에 대하여 무상으로 알고 보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비구들이여, 느낌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연속적인 두 순간에 결코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통찰력으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통찰지혜를 가지고 느낌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보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바른 길에 들어오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느낌은 보통 오래 지속되는 통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통증은 관념입니다.

통증의 실재는 찌르고 당기고 화끈거리는 것들인데

사실은 이것들이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들입니다.


느낌은 언제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느낌에 대한 꿰뚫는 통찰력을 얻지 못한 수행자는

아직 바른 수행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혹은 느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느낌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느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수행자는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느낌의 전 과정을 지속적으로 모두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는 사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일부러 느낌을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통증이나 가려움, 아픔을 겪을 때

느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느낌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느낌은 항상 모든 곳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바탕으로 한 여섯 가지 느낌 중에서

항상 하나의 느낌은 존재합니다.


느낌은 그 이상의 것이라는 말은

느낌에 모든 법이 담겨져 있다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대상 중에서 느낌을 통해서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 가장 용이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바로 느낌인 것입니다.


느낌이 없는 순간은 단 한 찰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반드시 오온 중에 하나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은 무상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이렇게 무상과 도, 무상과 도가 계속되어

더 이상 무상과 도 사이에 끼어드는 번뇌가 없을 때라야

이번 생에 도과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은 맨느낌으로 느끼는 것과

육체적인 느낌으로 느끼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육체적 느낌에서 정신적 느낌으로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느낌은 반드시 갈애를 일으켜서 우리들에게 끝없는 괴로움을 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무상수관입니다.

이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대상으로 보는 법념처 수행을 말합니다.


반면에 수행자가 단지 느낌을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가 성숙될 것입니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첫 번째 단계로서 높은 지혜의 단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로부터 시작되어서

다음 단계에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되고

그 뒤에 현상을 바로 아는 지혜가 생겨서

비로소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보아서 더욱 수행이 발전하게 됩니다.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면 원인과 결과를 알고,

현상을 바로 보게 되며, 그 뒤에 소멸과 두려움을 알게 되는 지혜가 생성됩니다.


소멸과 두려움을 아는 지혜가 생기면 다시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가 생겨서

더욱 열심히 수행을 정진하게 되고, 그 끝에 평등심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균형된 시각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요함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계속 정진을 하면 우리들의 궁극의 목표인

도와 과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도 느낌을 통하여 도과에 이르는 길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