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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ㆍ위빳사나(止.觀) ③ - 본삼매와 찰나삼매

通達無我法者 2011. 3. 13. 20:00

 

 

사마타ㆍ위빳사나(止.觀) ③ - 본삼매와 찰나삼매

 

 

이번 호에서는 본삼매와 찰나삼매에 대해서 살펴보자.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 문헌들에서는 사마타로 성취되는 삼매를 ‘본삼매’라 부르고 위빳사나 때의 고도의 집중은 ‘찰나삼매’라 정의한다. 여러 경들에서 부처님은 삼매를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cittassa ekaggataa)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들은 이 한 끝을 하나의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고 삼매에 드는 마음의 대상을 ‘닮은 표상(ptibha-ga-nimitta)’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마타는 마음이 닮은 표상이라는 대상에 집중된 상태이다. <청정도론>을 위시한 모든 주석서 문헌에 의하면 이러한 집중은 근접삼매(upaca-ra-sama-dhi)와 본삼매(appana--sama-dhi)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아비담마 길라잡이>는 다시 더 자세히 ①준비단계의 수행 ②근접삼매의 수행 ③본삼매의 수행으로 삼매 수행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①준비단계의 수행은 근접삼매가 일어나기 이전 초보단계의 수행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다섯 가지 장애들이 억압되고 닮은 표상이 일어나는 순간 직전까지의 단계를 말한다. ②근접삼매는 다섯 가지 장애들이 억압되고 닮은 표상이 출현할 때 일어나 선(禪)의 경지로 들어가는 인식과정에서 본삼매에 들기 직전의 마음인 종성(種姓, gotrabhu-)의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까지를 뜻한다. ③그리고 이 종성의 마음 바로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이 본삼매이며, 이것이 바로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경지이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법을 대상으로 하여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닮은 표상이라는 표상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위빳사나 수행에는 본삼매가 없다. 그렇지만 고도의 집중이 없이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의 고도의 집중을 본삼매라고는 부를 수 없다. 위빳사나의 대상은 표상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찰나생ㆍ찰나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등의 주석서 문헌들은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고도의 집중을 ‘찰나삼매(khanika-sama-dhi)’라고 부르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찰나삼매는 순수 위빳사나를 닦을 때 나타나는 고도로 집중된 상태인데, 이러한 찰나삼매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나타나는 근접삼매에 필적하는 삼매라고도 하고 사마타 수행의 초선에 대비되는 삼매라고도 한다. 이처럼 순수 위빳사나의 경우에도 찰나삼매라는 삼매의 토대는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마타 수행을 먼저 하지 않고 바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를 <청정도론> 은 ‘마른 위빳사나를 하는 자(sukkha-vipassaka)’ 혹은 ‘순수 위빳사나를 닦는 자(suddha-vipassaka)’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ㆍ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의 힘으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ㆍ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한다.


각묵스님 /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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