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산책·각묵스님

중도의 특징 몇 가지 - 팔정도 ⑤

通達無我法者 2011. 1. 13. 21:20

 

 

 

 

 

 

 

 

중도는 부처님의 명령

중도는 닦고 많이 공부짓는 것

 

 

지난 호의 설명을 바탕으로 몇 가지 관점에서 다시 중도인 팔정도를 음미해보자.

 

첫째, 거듭 강조하거니와 팔정도가 중도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일()을 여읜 것으로 정의되는 팔불중도(八不中道)나 공()으로 정리되는 <중론>의 삼제게(三諦偈, 24:18)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경에서의 중도는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둘째, 이처럼 중도는 철학이 아니라 팔정도라는 실천체계이다. 우리는 중()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에 바탕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설명은 오히려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크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ṭipadā)가 실제로 길 위를(paṭ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셋째, 중도로 표방되는 수행은 총체적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8가지로 말씀하셨지 어떤 특정한 기법이나 특정한 하나만을 가지고 도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8가지가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개발되어나갈 그것이 바른 중도다. 그러나 우리는 수행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하지 않고 기법 테크닉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그래서 간화선만이, 염불만이, 기도만이, 위빳사나만이 진짜 수행이라고 우기면서 극단으로 치우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중도가 아니요 극단적이요 옹졸한 도일뿐이다.

 

넷째, 중도는 바로 지금여기에 있다. 중도는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하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사찰이나 선방이나 명상센터라는 특정 장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도는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매순간 머무는 곳, 바로 지금여기(diṭṭhe va dhamme, here and now, 現法)’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스님도 직시현금 갱무시절(直是現今 更無時節. 바로 지금여기일 뿐 다른 호시절은 없다)이라 하였다.

 

다섯째, 중도 수행은 한 방에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수행 특히 팔정도에 관한한 초기불전에서 거듭 강조하시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은 닦고 많이 [공부]짓는 것이다. 이것은 < 상윳따>(S45) 도처에서 이것은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중도는 팔정도를 많이많이 닦는 것이다. 범부는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 중도인 팔정도를 실천하고 깨달은 분들은 팔정도로써 깨달음을 이 땅 위에 구현하신다. 예를 들면 주석서(DA.ii.301)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를 예비단계의 도라고 설명하고, 전자와 후자에 다 적용되는 것을 혼합된 도라 부른다. 여기서 혼합된 도란 예비단계의 도와 완성된 출세간도가 섞여 있는 것을 말하고 예비단계의 도란 출세간도를 얻기 위해서 닦는 그 이전 단계의 도를 뜻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직계 제자 때부터 사사나(sāsana, 교법, 명령)라 불렸다. 실천으로서의 부처님 명령은 극단을 여읜 중도요 그것은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닦아서 지금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라.’는 부처님의 지엄하신 명령은 저 멀리 내팽개쳐버리고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명성이나 지위나 잇속을 충족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각묵(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