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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빳사나는 ‘무상고 무아 통찰’ 그 자체

通達無我法者 2011. 3. 13. 19:58

 

 

 

위빳사나는 ‘무상고 무아 통찰’ 그 자체

 

 

 

■ 사마타.위빳사나(止.觀) ②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비교


이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서 살펴보자. 첫째, 사마타든 위빳사나든 중요한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施設, pan~n~atti)이고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dhamma)이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대한 집중이고 위빳사나는 대상(법)에 대한 통찰이다. 사마타(samatha)는 마음이 표상에 집중되어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그치고(止)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지(止)로 옮겼다. 위빳사나(vipassanaa)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a)’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법의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觀)으로 옮겼다. 이처럼 사마타는 표상이라는 대상에 집중하는 삼매(定) 수행이고 위빳사나는 법이라는 대상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하는 반야(慧, 통찰지) 수행이다.

 

 

사마타=삼매, 위빳사나=반야

수행기법일뿐 ‘先後’문제 안돼

 

셋째, 사마타의 키워드는 닮은 표상이고 위빳사나의 키워드는 무상.고.무아이다. <청정도론>은 사마타의 대상을 40가지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대상 가운데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만들고, 이것이 마침내 닮은 표상(相似影像, 상사영상, patibhaga-nimitta)으로 승화되어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이 이 닮은 표상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 한다. 위빳사나는 마음(心), 마음부수(心所), 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넷째, 삼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마타로 성취되는 삼매는 본삼매라 하고 위빳사나 때의 고도의 집중은 찰나삼매라 부른다. 근접삼매와 본삼매와 찰나삼매는 주석서 문헌에서부터 나타나는 전문술어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논의하겠다.

 

다섯째,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 탐.진.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진.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경에서는 일시적인 해탈(samaya-vimutta, <일시적 해탈 경>1(A5:149) 등)이라 한다. 그러므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의 힘으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한다.

 

여섯째, 사마타를 먼저 닦을 것인가 위빳사나를 먼저 닦을 것인가는 결국 인연 닿는 스승의 지도방법과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마타를 반드시 먼저 닦아야 한다거나 위빳사나만을 닦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수행은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로 귀결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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