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1. 안심법문 - 3) 안심삼매(安心三昧)

通達無我法者 2007. 4. 6. 22:11



안심삼매(安心三昧)

 


 

이 안심법문1)을 다른 말로 하면 안락법문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마음과 몸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안심하면 바로 안락스럽게 되겠지요.

1) 안심법문(安心法門) : 안락법문(安樂法門) 또는 안상삼매(安詳三昧)로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법문(法門)을 의미(意味)함


 

복사물에 다 있습니다마는 중요해서 재차 여러분들한테 시각적으로 보다 더 인식을 깊이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발췌 정리했습니다.

저같이 한문 세대인 나이를 많이 드신 분들은 몰라도 젊은 세대는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 되고 하여도 한자를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한글로 음을 달았습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야말로 글자만 봐도 마음이 편안한 법문입니다.

안심법문은 바로 안락법문입니다.


불교의 특색은 마음과 몸을 절대로 둘로 안봅니다. 하나로 봅니다. 마음도 몸도 하나요, 또는 자연(自然)과 인간(人間)도 하나요, 우주(宇宙)를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한 핵심(核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안심스러우면 몸도 안락스럽고, 불교 전문적인 참선하는 공부로 말할 때는 안상삼매(安詳三昧)라! 편안할 안()자, 자상할 상()자입니다. 차분하게 우리가 조금도 서둘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안스러워야 서두르는 것인데, 급할 것도 없고, 앞에 갈 것도 없고, 끝에 갈 것도 없고 말입니다.

자기만 잘나고 자기만 무엇이 잘되고 그런 때는 우리 마음이 안락스럽게 안됩니다. 안심이 안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언제나 꼼꼼하고 자상스럽고 말입니다. 이른바 유연스러운 것, 이것이 안상입니다. 안상삼매라. 삼매(三昧)라는 것은 오로지 거기에 몰입한단 말입니다.

인도(印度) 말로는 삼마지(三摩地Samadhi)인데, 삼매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쓰지 않습니까. 거기에 몰입하는 이것이 삼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움직이나 누구하고 말을 하던지간에 언제든지 마음이 차분하고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안상삼매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고 몸도 안락스러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안심이 되고 안락 스러울려면 우리 공부하는 것도 역시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우선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이치로 막힘이 없어야 비로소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룻 길도 우리가 길을 잘 모르면 불안스럽고 헤매지 않습니까? 길을 가더라도 갈래를 알아야 이제 안심하고 갈 수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살이는 더욱 가는 길이 확실하여야 되겠지요.


더구나 현대와 같이 정보가 종횡으로 착종(錯綜)하고 있는 이런 시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현대를 가리켜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라 하지 않습니까.

정보화 시대가 좋기는 좋은데 정보가 너무나 범람하므로 자기 인생관(人生觀), 가치관(價値觀)이 확립 안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느 정보를 우리가 선택할 것인가?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저번에 신문 쪽지를 보니까 미국 사람들 5분의 3정도는 노이로제 증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항시 마음이 불안스럽기 때문입니다.

항시 긴장되어 있고 항시 스트레스를 풀래야 풀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병의 원인도 되고, 가정 불화의 씨앗도 되고, 민족들끼리 분열도 되고, 그럴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그런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내일은 어떻고 우리 공부는 어떠할 것인가?

부처님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도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더러 대답을 확실히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오후수라! 선오후수라는 말을 우리가 꼭 명심해서 자기가 선오후수가 되도록까지 노력을 해야합니다.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만은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참다운 중도(中道)를 깨닫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참선(參禪)도 하고 기도(祈禱)도 모셔서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나야 되겠습니다만 그렇기 전에 이론적(理論的)으로 먼저 깨닫는단 말입니다.


더구나 이 현대는 이론적인 논리(論理)가 앞선 시대 아닙니까? 하기 때문에 꼭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논리로 해서 먼저 깨닫고서 뒤에 닦아야만 이른바 정수법문(正修法門)입니다. 바르게 닦는 법문입니다.

덮어놓고서 공부해라. 이렇게 해서는 지금 통할 때가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의 요체는 어떤 것인데 그대는 지금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그대한테 제일 좋다. 남한테 지도를 못 받으면 스스로 연구해서라도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서 나한테 알맞은 것은 어떤 법문인가?

분명히 선택해서 공부를 하여야 이제 마음이 안락스럽습니다. 그래서 선오후수, 먼저 이론적으로 알고 단계단계 느끼면서 닦는 그러한 법문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법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