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 (7) 아난의 득도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2:02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7) 아난의 득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이든지 교든지 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 이론은 중도(中道)에 서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는 부처님이 ‘중도를 정등각했다’고 말씀하신 그 깨친다는 것, 즉 깨달음의 실천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론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수집한 것을 팔만대장경이라 해서 경전이 전해 내려왔지만 깨치는 실천에 있어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전해서 내려왔는데 제일 처음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마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섭존자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서 자기와 똑같이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가섭이라고 여러 번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때에 세존은 말할 수 없이 많은 대중 가운데서 마하가섭이 자기와 똑같은 광대한 승묘공덕이 있음을 칭찬해 마치시니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환희하여 받들어 행하니라.

爾時에 世尊이 於無量大衆中에 稱歎摩訶迦葉의 同己廣大勝妙功德己하시니 諸比丘가 聞佛所說하고 歡喜奉行하니라. [雜阿含經;大正藏 2, p. 302上]


앞에서 더 자세한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 해도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을 가섭존자가 갖추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깨친 자리에 있어서는 확철히 깨쳤으면 다 같겠지만 부처님께서 자기와 똑같다고 칭찬한 사람은 가섭존자뿐이며 그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해 준 것입니다.

다음은 열반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려 하니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 살 것인가 하면서 울고불고 야단이었습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절대로 슬퍼하지 말아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무상정법은 모두 마하가섭에게 전하였다. 가섭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큰 의지됨이니 마치 여래가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의지처가 되듯이 마하가섭도 또한 이와 같다.”

佛告諸比丘하사대 我今所有無上正法을 悉以付囑摩訶迦葉하니라 是迦葉者는 當爲汝等의 大依止함이 猶如如來爲諸衆生作依止處하야 摩訶迦葉도 亦復如是니라. [大般涅槃經;大正藏 12, p. 377下]


부처님의 법맥은 가섭존자에게서 아난존자로 이어지는데 이제부터는 아난존자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경(經)을 결집하기 위하여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많은 제자들이 모였는데, 여기에 아난존자도 참석하려고 했지만 가섭존자가 끝까지 반대하여 결집 장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난존자가 우여곡절을 거쳐 부처님 법을 깨쳐서 결집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얘기하겠습니다.


가섭이 대중 가운데서 아난을 불렀다. “너는 마땅히 나가라. 지금 훌륭한 대중이 너와 함께 결집할 수 없느니라” 하였다.

아난이 그 말을 들으니 화살로 심장을 쏘는 것과 같아서 몸을 떨면서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멸도한 뒤에 너는 걱정하여 슬퍼하고 소리내어 울지 말아라. 내가 지금 너를 대가섭에게 부탁한다.’ 부디 기쁘게 생각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받드소서.”

迦攝波이 卽於衆中에 喚阿難陀호 汝宜出去하라 今此勝衆에 不應共爾하야 同爲結集이니라 阿難陀가 聞是語已하고 如箭射心하야 擧身戰懼하야 白言호대 …… 佛世尊이 臨涅槃時에 作如是語하사대 阿難陀야 我滅道後에 汝勿憂惱悲啼號哭하라 我今以汝로 付大迦攝波이라 하시니 幸施歡喜하야 奉大師敎하소서. [根本毘奈耶雜事;大正藏 24, p. 404]


한 비구가 말하되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로서 가까이서 법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니, 대가섭이 말하였다. “이런 학인이 배울 것이 없고 덕력이 자재한 대중 가운데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옴 오르고 병든 여우가 사자 무리 가운데 들어오는 것과 같다.”

比丘言호대 阿難은 是佛侍者니 親受法敎이니라 大迦葉이 言 如此學人이 入無學德力自在衆中은 猶如疥瘙野干이 入師子群中이니라 [摩訶僧祗律;大正藏 22, p. 491上]


‘학인(學人)’이란 공부를 다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중들은 아난이 부처님 시자로서 30년 이상 부처님을 모셨으니 누구보다도 부처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으므로 결집에 참여시키자고 주장하였으나, 가섭존자는 “여기는 지금 공부를 성취하여 실지로 깨친 사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찌 병든 여우 같고 배움을 성취하지 못한 아난을 참여시킬 수 있느냐”고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욕설 같지만 아난에게는 그렇게 충격을 주지 않으면 참으로 분심을 내서 용맹정진하여 대법을 얼른 깨칠 수 없으므로 자비로써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난보다 더 많이 부처님 법문을 기억하고 있다 하여도 스스로 대법을 깨치지 못하면 옴 오르고 병든 여우가 되고 설사 일자무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지로 중도를 깨치고 자성을 깨친 사람은 사자입니다.


대가섭이 대중 가운데서 아난을 손수 끌어내며 말하되 “지금 청정한 대중 가운데서 장경을 결집하려 하는데 너의 업결이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니 여기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 너의 번뇌를 다 끊은 후에 들어올 것이요, 업결이 남아 있으면 들어오지 말라” 하고는 손수 문을 닫아 버렸다.

大迦葉이 衆中에 手索阿難出하고 言호대 今淸淨衆中에 結集經藏하노니 汝結이 未盡하니 不應住此라 斷汝漏盡然後에 來入이요 殘結未盡이어든 汝勿來也라 如是語竟 便自閉門하니라. [大智度論;大正藏 25, p. 68上]


이렇게 쫓겨난 아난이 비야리성에 있으면서 항상 대중을 위해 밤낮으로 설법함에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는 것이 부처님 계실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발기(跋耆)비구라는 이가 있어 누각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다가 이곳이 시끄러워서 모든 해탈삼매에 들 수가 없어서 아난 있는 곳에 가서 게송을 지어서 말하였다.


고요한 나무 밑에 앉아

마음은 열반에 두고

너는 참선하며 방일하지 말라

많은 말 무슨 소용 있는가.

阿難이 在毘舍離하야 恒爲四衆 晝夜說法하니 衆人來往이 殆若佛在니라 有跋耆比丘하야 於彼閣上에 坐禪할새 以此鬧亂하야 不得遊諸解脫三昧라 便往阿難所하야 爲說偈言호대

靜處坐樹下하야 心趣於泥洹하야

汝禪莫放逸하라 多說何所爲오. [五分律;大正藏 22, p. 190下]


대부분의 경전을 보면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가섭존자에게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경전에서는 아난이 비야리성에 있으면서 ‘결집하는 대중 가운데 절대로 참여할 수 없다’는 가섭존자의 통고만 받은 것으로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난이 대중 가운데서 쫓겨난 것이 지배적입니다. 어쨌든 결집할 처음에는 참여하지 못한 것만이 분명합니다.


아난이 혼자 있으면서 정진하며 방일하지 않으니 고요하여 시끄러운 것이 없었다. 이것은 아난에게 지금까지 한번도 있어 본 일이 없는 법이었다. 그때에 아난이 집밖에 있으면서 새끼로 만든 좌상에 앉아 참선하고 밤에는 많이 걸어다녔다. 밤이 지나고 날이 새려고 하는 새벽에 몸이 극히 피곤하여, ‘내가 지금 지극히 피로하니 좀 앉아야겠다’고 생각한 후 앉았다. 앉으니 이제는 눕고 싶어져서 누우려고 하여 머리가 미처 베개에 닿기도 전에 마음이 무루 해탈함을 얻었다.

阿難이 卽便獨處하야 精進不放逸하야 寂然無亂하니 是阿難의 未曾有法이니라 時에 阿難이 在露地에 敷繩床하고 夜多經行이러니 夜過明相이 欲出時에 身疲極이라 念言호대 我今疲極하니 寧可小坐라 하고 念已卽坐하야 坐己方欲臥하야 頭未至枕頃에 於其中間 心得無漏解脫하니라. [四分律;大正藏 22, p. 967上]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난존자가 깨치지 못해서 처음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고 쫓겨난 후 용맹정진으로 공부하여 깨친 뒤에야 결집에 참여해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경들을 결집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도 우리 불법은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많이 듣기로는 제일이지만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는 가섭존자의 법제자가 됩니다. 아난존자가 30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며 모든 법문을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가섭존자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불법이란 근본이 깨치는 데 있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입니다.

그 이후로 누구든지 불교역사를 쓸 때는 아난존자를 가섭존자의 법제자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난존자같이 용맹정진하여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디를 가도 쫓겨날 것입니다.


아난이 열반한 후에 모든 비구들이 각각 좌선만 익히고 다시는 경전 읽는 것을 익히지 아니하고 말하되 “부처님에게 3가지 일이 있으니 좌선이 제일이다” 하고 마침내 각각 경전을 소리내어 읽는 것을 폐지하였다.

阿難이 便般涅槃時에 諸比丘各習坐禪하고 不復誦習云 佛有三事하니 坐禪第一이라 하고 遂各廢諷誦하니라. [分別公德論 2;大正藏 25, p. 34上]


아난이 깨친 뒤에야 총명, 지혜가 소용없음을 체험하고 제자들에게 좌선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아난존자가 열반한 뒤에도 제자들이 좌선에만 힘쓰고 경을 익히고 문자를 익히는 것은 폐지했다고 하듯이 인도에 있어서도 불법을 전함에 좌선하여 깨치는 것이 근본이 되어 있음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