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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安)은 인연의 근본이며, 반(般)은 있을 바가 없는 것이다. 도인은 좇아오는 비가 없는 근본을 알고, 또한 있을 바가 없는 멸을 안다. 이것이 수의이다.
해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인연법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이 세상에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원인과 결과는 이것과 저것의 관계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다는 붓다의 단언은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엄연한 사실이고 엄숙한 진리이다. 호흡도 마찬가지로 이런 연기(緣起)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들숨은 공기가 저절로 들어오는 것도, 어떤 절대자의 의도에 의해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폐 속으로 공기가 들어오도록 신체구조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의 늑골을 치켜올리고 횡경막이 수축하여 아래로 처지면 가슴이 넓게 펴져 숨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런 신체구조를 갖추었더라도 공기가 없으면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기와 폐, 횡경막, 늑골 등이 서로 어울려 자율신경의 반사작용에 의해 숨이 폐 속으로 들어온다. 자율신경의 작용은 호르몬 분비에 의해 이루어지고, 호르몬 분비는 숨을 들어오게 하겠다는 의식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이 근본적인 인(因)이라면 다른 것은 연(緣)이 되어, 두 가지가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숨이 폐로 들어오게 된다. 공기와 폐가 있기 때문에 정신이 있다고 한다면 유물론이요, 정신이 있기 때문에 공기와 폐, 횡경막이 있다고 한다면 유심론이다.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종교는 정신이 더 근본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인과 연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이며,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인과 연이 어울려서 호흡이 이루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을 볼 때, 들어오는 숨이 근본이 되어 나가는 숨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나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호흡도 예외는 아니어서 들어온 공기는 내보내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들숨이 근본 인연이요, 날숨은 있을 바가 없다고 했다. 즉 들어오는 숨은 근본 인연이므로 들어오게 해야 하고 머물 곳이 없는 숨은 나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살아가려면 공기가 충분히 들어오게 했다가 다사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온 숨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주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진리를 아는 도인은 모든 것이 본래 어디에서 오며 또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공기가 충분히 들어와 생명에 활력을 주고 또 충분히 나가서 더러움을 없애 생명의 발전을 기한다. 이렇게 생과 멸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생과 멸이 지속되면 생과 멸을 초월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은 생과 멸 속에 있으면서도 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세포는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 어디까지가 생이고 어디까지가 멸인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생명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호흡도 어디까지가 들어오는 숨이고 어디까지가 나가는 숨인지 알 수 업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공의 도리요 연기의 도리이다.
찰나의생, 찰나의멸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삶이 정신을 위주로 하여 영위된다고 한다면, 그 삶은 정신이 집중되어 그것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잇다. 이것이 수의로 호흡이 올바르게 행해질 수 있다고 한 말의 뜻이다. 《잡아함경》 제26권의<단각상경(斷覺想經)>은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한다.
"마땅히 안나반나의 염(念)을 닦으라. 안나반나의 염을 닦아서 많이 수습하면 여러 느낌이나 생각들을 끊게 된다. 안나반나의 염으로 많이 수습하여 여러 가지 느낌이나 생각을 끊는다 함은, 비구가 마을이나 도성에 머물러 있을 때라도 위에서 설법한 바와 같이 나가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잘 배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잘 배운다,'는 숨을 충분히 길게 내뿜어서 멸의 극치에 이르러 자연히 들어오게 하라는 의미이다. 멸의 극치에 생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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