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17. 네 가지 즐거움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5:23

1-17. 네 가지 즐거움

수의에는 네 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는 원하는 것을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그침을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가능한 것을 아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네 가지 즐거움이다.

해설
올바른 호흡으로 마음과 몸이 안정되면 몸과 마음에는 여러 가지 징표가 나타난다. 그 중에서 즐거운 일이 생길 것이다. 그 즐거움은 마음의 조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써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다면 아직도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첫째는 하고자 하는 바를 아는 즐거움이 나타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에 따라서 모든 삶이 영위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하루를 무의식 속에서, 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목적이 없는 사물은 없다. 모든 존재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목적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맹목적인 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모르고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도를 취한다.

올바른 호흡이나 마음을 가졌을 때에는 몸과 마음이 즐겁기 마련이다. 이 즐거움은 내가 살아 있다는 만족감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만족이란 바로 삶의 목적이 달성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스스로 만족하고 즐겁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표현이다. 스스로 만족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행위야말로 나의 할 일이자 목표이다.

올바르게 호흡하면서 그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면 내 생명이 바라는 바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호흡을 통해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생기는 즐거움은 내 생명의 근본 욕구가 채워지고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즐거움이다. 만일 호흡을 중단하여 들숨과 날숨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면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 생명의 근본 욕구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법을 하는 즐거움이다. 법을 안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알려져 거기에 머물게 되었을 때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면 그곳에 안주하여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즐거움이 저절로 따른다. 이는 누가 주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난 것이다. 올바른 호흡과 정신집중으로 몸과 마음이 안온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진실이 환하게 드러나니 이때의 즐거움은 더없이 크다. 진실이 서로 통하고, 질서가 서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몸에 느껴지는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상태에 있게 되면 즐거움이 있다. 봄이 되면 꽃이 펴야 하고 아름다운 꽃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추워야 하고 눈이 와야 한다.

좋은 것을 즐겁게 느끼고 나쁜 것을 괴롭게 느끼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의해 좌우된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즐거움이 오면 즐겁고 괴로움이 오면 괴롭다. 그러나 마음이 격랑 속에 휩쓸려 있을 때는 즐거움도 즐거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맑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처럼 유지하고 있어야 모든 사물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따라서 즐거움도 솟아나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절대적이다. 그렇게 머물고 있는 것이 불변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침을 아는 즐거움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그친 상태에서 느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그친 상태에서 느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이 세상 만물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그것들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에 느끼는 즐거움이 법을 아는 즐거움〔法樂〕이지만, 마음에 동요가 생기면 그 즐거움이 사라질 수 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신집중이 지속되면 사물을 대하는 심안(心眼)의 관찰력이 더욱 심화되어 사물의 진실을 파악하게된다. 이때 다시 새롭고 깊은 것을 알게 되니, 그것은 그 사물에만 있는 진실이 아닌, 일체의 사물과 통하고 우주의 생명과 하나가 되는 보편성에 대한 발견이다. 이 경지에서 마음은, 한 가지 사물을 대할 때마다 그 사물만이 가진 특수성과 아울러 우주적인 보편성도 통찰하게 되는 즐거움을 맛본다.

붓다의 6년 고행은 실로 괴로움을 참는 수행이었으나 보리수 밑에서의 명상 끝에 그것을 버리고 모든 사물에 마음을 집중하여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고행시의 생로병사가 는 모두 서로 모순된 것으로서, 해결되지 않는 갈등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보리수 밑에서의 생로병사는 모순된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값지게 하는 새로운 가치로 각성되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가 없는 인생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는 인생이다. 생이 있기에 늙음과 병과 죽음이 있다.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하는 생명이 생로병사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해 낸다는 데에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붓다는 생로병사 속에서 절대 생명을 획득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붓다의 깨달음은 실로 일체 만상에 대한 관심이 새로운 가치의 발견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처럼 안반수의는 호흡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의 길이기도 하다.

넷째는 즐길 만한 것을 아는 즐거움이다. 즐거운 상태에 머무르면서 가히 즐길 만한 것을 충분히 맛보는 즐거움이다. 들숨의 상쾌함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의 즐거움도 즐길 만하다. 그러나 날숨 또한 즐거움은 준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가히 즐길만한 것임을 알면 자재(自在)에 머물게 된다.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나가면 나가는 대로 즐거움에 따를 뿐,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절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절도 있는 즐거움이 가히 즐길 만한 즐거움이다. 정신집중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가치의 한계 내에서 충분히 즐기고 즐거움을 얻는 방편이다.

붓다는 인생을 고(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인생이 고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이 즐겁다는 사실도 알 수가 없다. 고를 통해 즐거움을 얻었을 때 즐거움이 더욱 커지면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다. 붓다는 인생의 괴로움을 통해서 더 없는 절대적 즐거움에 머물렀고,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한 절대가치의 삶을 살았다. 불교는 고를 깨달아서 낙(樂)으로 가는 가르침이며 무상을 통해서 영원한 삶을 사는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