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식은 밖을 끊고, 상수는 안을 끊는다. 지는 죄를 그치게 하고, 관을 행하여 마음을 물리친다.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환이요, 생각을 끊음은 정이다.
해설 불교에서 말하는 외부의 객관 세계는 형태가 있는 것〔色〕과 소리〔聲〕와 향기〔香〕와 맛〔味〕과 감촉〔觸〕고 대상〔法〕으로 이루어진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객관 세계에서 받아들인 정신작용 때문에 번뇌나 망상, 잡된 생각이 일어나서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숨을 헤아려서 정신이 숨에 집중되면 밖의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차단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귀나 코나 혀와 같은 몸과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그것으로 인해서 죄를 짓게 되고 따라서 고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감 기관을 조절하여 객관 세계에 끌려가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과 마음이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수식은 밖을 끊고, 상수는 안을 끊는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어떤 대상에 머물러 있으면 죄를 짓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결국 죄도 마음에서 짓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요히 한 곳에 머물러 사물의 진상을 올바로 알게 되면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성내는 일도 없으며,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게 된다. 또한 내 마음대로 마음을 부릴 수가 있게 된다. 어떤 것을 보든지 어떤 것을 생각하든지 마음이 나와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세간의 잡된 것들에 끌리지 않고 진리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 일러서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단 세간(世間)이란 주관과 객관이 대립되어 있는 세계이다. 여기에는 갈등과 모순만이 있다. 객관에도 주관에도 끌리지 않으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그러한 모순이나 갈등이 없는 세계에 머물 수 있다. 이것이 바로'나 자시'의 세계로서, 우리는 그 세계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나는 참된 내가 인다. 본래의 나는 고요하고 모순이 없으며 죄를 떠나 있다. 참된 나는 청정한 본심 속에 있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잡된 생각이 끊어지면 청정한 본래의 나로 되돌아온다. 부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청정본심은 지혜의 빗이나 자비의 따사로움으로 묘사될 수 있으며 깨끗하고 둥글고 밝은 달빛이나 햇빛과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는 주객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와 자재의 활동이 있다. 선과 악은 물론 번뇌, 깨달음이라는 말도 없으며 윤회를 떠난다는 것조차 없다. 숨과 마음이 서로 따르는 일도, 숨을 세는 일도 없다. 또한 마음이 어디 머무는 일도 없으며 객관 세계를 관찰하거나 주관으로 돌아오거나, 깨끗하거나 더럽다는 일체의 사유kamavitarka를 떠나서 사유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한결같이 일치하여, 들어오는 공기는 더없이 고귀해지고 우리의 몸은 허공과 같아진다. 《잡아담심론》 제8권에 이러한 경지를 묘사한 구절이 있다.
"이러한 수행자는 들숨과 날숨에 있어서 한 생각을 짓고, 관(觀)하는 것이 대화살〔竹箭〕과 같고 관주(貫珠)와 같다."
이것이 더욱 진전되어,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하나가 되어 한결같은 되풀이 속에서 들어오고 나간다는 생각이 없어지면 몸이나 숨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완전하고 올바른 이런 호흡이 붓다가 가르친 안반수의이다. 그러므로 '들숨과 날숨이 움직이지 않으면, 몸에 있어서 신식(身識)을 발하지 않는다. 이것을 안반념의 성취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때에는 몸을 인식하더라도, 한편으로 인식이 몸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 인식이 몸을 해치지 못한다.
안반수의법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 방편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불교에서는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호흡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다시 말하지만 들어온 숨이 다하기 전에는 숨이 나가는 법이 없고, 나간 숨이 다하지 않고는 들어오는 법도 없다. 아는 하나가 다해야 반대의 것이 있게 되는 연기의 도리 그대로이며 세상 모든 것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또한 숨이 들어오면 그것을 멸하기 위해 고(苦)가 바싹 닥쳐온다. 고로 인해 숨이 나가고, 그 날숨 또한 극치에 이르러 멸한다. 이와 같이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것이 고의 실천이며, 그 고를 통해서만 고 자체를 멸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 바랄 바가 없음을 깨달아 해탈케 하는 씨앗이 된다. 들숨과 날숨이 생하고, 머물고, 멸하는 것은 인연에 의한 것이며 우마(無我)의 실상이다. 그것을 결코 나 자신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들숨과 날숨 그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다. 이는 곧 들숨과 날숨이 상대적인 것이요 본래 공(空)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들숨, 날숨 자체에 집착하지 않게 되니 이것이 곧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따라서 호흡은 상(相)을 통해서 상이 없음을 아는 씨앗이 된다. 호흡에 이러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붓다가 가르친 안반념법의 깊고 높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잡아비담심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들숨이 멸하지 않고서는 날숨이 생하지 않고, 날숨이 멸하지 않고서는 들숨이 생하지 않음을 안반에 의한 무상행도(無常行度)라고 한다. 들숨의 핍박 때문에 날숨이 멸한다. 이를 고행도(苦行度)라고 한다. 또 방편무원해탈문종자(方便無願解脫門種子)를 얻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들숨과 날숨의 생(生)·주(住)·멸(滅)은 자재(自在)가 아니라 들숨과 날숨에 의한 무아행도관(無我行度觀)이라고 한다. 들숨과 날숨은 상(常)을 떠나므로 공행도(空行度)이다. 이것은 방편공해탈문종자(方便空解脫門種子)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들숨과 날숨에 있어 염심(厭心)을 일으켜 열반으로 향한다. 이를 방편무상해탈문자(方便無常解脫門種子)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