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2-5. 오온의 청정함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5:32

2-5. 오온의 청정함

마음이 산란하면 마땅히 숨을 세고, 마음이 안정되면 마땅히 (숨과 마음이) 서로 따르고, 마음을 끊으면 마땅히 머물게 되고, 도를 얻으면 마음은 마땅히 관이 되고, 오음으로 향하지 않으면 마땅히 (하나로) 돌아오고, 가진 바가 없으면 마땅히 청정해진다.

일이 많으면 마땅히 숨을 세고, 일이 적으면 마땅히 서로 따르고, 집안에서 마음이 다하면 마땅히 머물게 되고, 세간이 두려우면 마땅히 관이 되고, 세간을 바리지 않으면(하나로) 돌아오고, 마음을 끊으면 청정이 된다.

어찌하여 수를 세는가. 오음이 따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서로 따르는가. 오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그치는가. 오음을 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오음을 관하는가.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몸의 근본을 아는가. 고를 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하나로)돌아오는가. 생사를 염리(厭離)하기 때문이다. 곧 지혜로움에 따라서 여덟 가지 종류의 도를 따로 얻어서, 바라는 바가 얻어지게 된다.

해설
깨달음은 올바른 삶의 지혜이다. 흔히 불교, 특히 선(禪)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 즉심시불(卽心是佛), 혹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여, 마음을 절대적 가치의 대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유심론적인 입장만을 고집하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활에서 마음이 중요하고 근본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몸과 대립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있는 마음을 문제삼는다. 몸과 마음을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가 보는 몸과 마음은 본질적으로 엄격하게 한계를 지을 수 없다. 몸 없는 마음이 없고, 마음 없는 몸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성성불도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조화로운 활동을 하고 있는 본래의 모습, 즉 본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의미이다.

일체유심조도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있게 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마음에 의해서 평가되고 그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마음과 몸가짐, 그리고 말에 의해 이루어진다. 올바른 마음가짐이 올바른 몸가짐과 말을 낳게 하지만, 반대로 올바른 몸가짐과 말도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나, 그 중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마음이 으뜸이라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이는 실제 삶에서도 실증적으로 증명된다.

우리의 삶은 주관의 세계인 마음과 객관의 세계인(삶의) 조건에 의해서 좌우된다. 주관의 세계는 마음이라고 말해지는 모든 정신작용이요, 객관의 세계는 세간(世間)이라고 말해지는 모든 사물이다. 모든 사물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모두 포함된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요소들을 오음(五陰(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은 연기의 도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음과 몸, 나와 너, 나와 사회, 나와 자연 등 이것과 저것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올바른 상태는 청정한 상태이다. 연기 그대로의 상태, 중도,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공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올바른 삶이다. 청정한 마음이란 아무것도 갖지 않은 마음이다. 바로 무소유(無所有)이다. 마음이 청정하려면 먼저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편이 수를 헤아리는 것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육체의 운동이요, 수를 세는 것은 마음의 조정이다.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면 흔들리지 않는 다. 마음이 마음을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역시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불기운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불기운이 보이지 않으면 불을 끌 수 없는 것과 같다. 연기와 불기둥 같은 불기운이 보이면 불을 끄기가 수월하지만 마음에서 일어난 번뇌를 없애기는 어렵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마음이 어떤 형태를 갖추어 몸에 나타나는 것이 호흡이므로 이 호흡을 조절하면 마음을 조절하기가 수월해진다.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수식과 상수, 지, 관, 환, 정은 이미 여러 차례를 설명한 바 있는데, 오온과 관련하여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환(還)'이다. 

객관 세계나 주관 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사물의 진실을 살필 수 있게 되니, 이것이 환이다. 환희 단계에서는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에 자재(自在)하면서도 끌리지 않는다. 주객 어디에도 끌리지 않으므로 아무런 소유 없이 뜻에 따라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이르면 번뇌나 선악의 대립이 없어지고 가진바 없이 갖게 된다. 깨달음의 세계에서 소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마음이 청정하다고 해도 상대되는 세계에 따라 생하고 멸한다. 따라서 일이 많아지면 그에 따라 마음도 잡다하게 일어난다. 이런 때에는 수식을 통해서 마음을 단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잡다한 일을 행하더라도 마음이 순일하면 일이 없이 한가한 상태에 머물러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몸이라는 집을 가지고 있다. 몸과 함께 하고 있는 마음은 몸의 보호 속에서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멋대로 움직이는 의욕이 다하여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내 마음속에 고요히 자리잡으면 그것이 바로 적정 그대로의 세계이다. 또한 의욕이 객관 세계로 달려가지 않도록 하여 객관과 멀리하고, 사물의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이 관조의 세계이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객관 세계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그것을 탐애하지 않으면 세간의 일체사에 초연하여 탐심을 일으키거나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일체의 잡된 생각이 끊어져서 청정본심 그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삶이다.

우리가 호흡을 헤아리는 것은 몸과 몸 안에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있는 한 오음에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오음에 따르면서도 그에 끌리지 않고 애욕을 갖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감수 작용이나 상념, 의식과 같은 오음을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동시에 인간의 근본요소인 오음이 본래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본래 오온이 공허한 것임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 마음이 안정되어 오온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되면 우리 몸의 근본이 공임을 알게 된다. 몸의 근본을 알면 여태 몸이나 마음이 실체가 있다고 생각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나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근본을 알면 당연히 고통을 떠나려고 할 것이다. 고(苦)를 떠나면 나의 진신(眞身)으로 돌아온다. 본래의 나는 청정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떠난 영원한 존재이다. 생사에 매인 나는 본래의 내가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가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이 구성 요소를 있는 그대로 알아서 이에 끌리지 않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 지혜를 얻으려면 안반념법을 잘 닦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팔정도(八正道)의 올바른 삶을 얻고 인생의 소원인 성불(成佛)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