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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수를) 얻었더라도 서로 따르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않는다. 서로 따르더라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않는다. 머물더라도 관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않는다. 관하더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않는다. 돌아왔어도 청정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않는다. 청정을 얻고 다시 청정해지면 수의가 된다. 이미 생각이 쉬면 악이 생기지 않는다.
해설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 중 어느 한 가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각 단계가 모두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어 결락이 있으면 결코 완전한 안반수의가 되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숨이 수식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정신집중이 될 수 없다. 숨과 수식이 일치하더라도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머물지 않고 흩어지면 정신집중도 안 된다. 또한 마음이 한 곳에 머물렀더라도 거기에 집중하여 관조하지 못하면 마음을 지키지 못한다. 또한 관조하는 힘을 얻었더라도 바뀌어 주관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않는다. 주관의 세계로 전환되었더라도 주와 객 어디에도 걸림 없는 주객일치의 상태에서 자유자재로 주관과 객관을 부릴 수 있는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참된 정신집중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섯 단계를 모두 거쳐 한결같이 청정한 상태가 계속될 때야 비로소 진정한 정신집중, 곧 수의이니, 이를 다른 말로 삼매(三昧)라 한다.
여섯 가지는 모두 연기의 관계에 있어서 이것이 잘 되면 저것도 잘되고, 이것이 잘 안 되면 저것도 잘 안 되는 법이다. 이런 이치를 알면 우리가 바라는 열반적정의 세계도 바로 이 수식관에 있음을 알게된다. 피안의 세계는 이미 차안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서방에 있다는 극락정토도 이 세계의 고를 벗어났을 때 도달되는 곳이다. 살고있는 이 사바세계가 구제되어 고를 떠나 즐거움을 얻은 중생이 극락세계에 가리라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서방은 바로 여기에 있고 정토는 사바세계에 있다. 내 마음속에도 있고 저 세상에도 있다. 《잡아함경》 제26권의 <아난경(阿難經)>은 이렇게 전한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부처님이 금강의 발구마(跋求摩) 강가의 살라리(薩羅利) 숲속에 머물고 계셨다. 이때 존자 아난이 홀로 고요한 곳에서 선정에 잠긴 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일 한 가지 법을 많이 닦으면 네 가지 법이 모두 구족하고, 네 가지 법이 모두 구족하면 일곱 가지 법이 이루어지고, 일곱 가지 법이 이루어지면 두가지 법이 이루어진다.’ 이때 아난이 선정에서 깨어나 부처님 처소로 가서 정중히 인사드리고 물러나서 한쪽에 앉아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홀로 고요한 곳에서 선정에 잠겨, 만일 한 가지 법을 많이 닦으면 네 가지 법을 이루고, 두 가지 법을 이룬다고 생각하였나이다. 그런데 정말 한 가지 법을 많이 닦으면 능히 두 가지 법을 구족하게 되겠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고하셨다. ‘한 가지 법을 닦으면 능히 두가지 법을 이루게 된다. 한 가지는 곧 안나반나인데 그것을 많이 닦으면 능히 사념처(四念處)를 만족케 한다. 사념처가 만족되면 칠각분(七覺分)이 만족되고, 칠각분이 만족되면 명(明)과 해탈이 구족된다. 어떤 안나반나의 염을 닦아야 사념처가 만족되느냐 하면, 한 비구가 마을에 갔을 때 거기 의지하여 날숨의 생각을 멸하는 것과 같이 하면 된다. 아난아, 이와 같이 거룩한 제자는 들숨을 생각할 때 들숨의 생각을 같이 한다. 몸을 움직여 쉬는 숨과 나가는 숨을 생각할 때 몸을 움직여 쉬는 숨과 나가는 숨을 생각하듯이 한다.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몸의 생각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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