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3-10. 삶과 죽음의 문제가 호흡에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5:55

3-10. 삶과 죽음의 문제가 호흡에 있다

서로 따르는 것은 미세함이 된다. 마음이 길게 (따르고)있으면 곧 마음을 바꾼다. 생각이 길기 때문이다. 마음이 짧게 (따르고) 있으면 곧 깨달아 마음을 그치지 않게 한다. 그치면 집착이 된다. 몸과 목숨을 버린 자가 행하는 호흡은 도의(道意)를 얻어서 몸과 목숨을 버린다. 아직 도의를 얻지 못했으면 항상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숨이 미세하면 도(를 이루게) 된다. 길면 생과 사가 되고, 짧은 호흡이 움직이면 생과 사가 된다. 도에 있어서 긴 것은 짧은 것이 된다. 어찌하여 도를 얻지 못하면 마음도 없는가. 지혜로움이 나타나 짧게 되기 때문이다.

해설
정신이 산란하거나 충격으로 긴장하면 호흡이 거칠어진다. 이와 반대로 숨이 길고 가늘게 나가면 정신도 고요히 안정된다. 정신과 육체, 정산과 호흡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호흡과 정신이 서로 따르고, 수를 헤아리는 관법이 익숙해져서 수를 세지 않고도 마음과 호흡이 함께 하는 단계에 이르면, 호흡은 스스로 미세해져서 가늘고 고요히 행해진다. 이렇게 되면 하나에서 아홉을 지나 열까지 헤아리는 동안에 마음이 한결같이 호흡에 따르게 되는데, 이때는 마음을 바꾸어 '나는 지금 길게 호흡하고 있다. 나는 왜 길게 호흡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마음이 안정되어 스스로 마음을 바꿔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호흡과 떠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임의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참된 자아의 세계, 곧 자재의 상태 속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과 호흡이 오래 함께 하지 못하고 금방 흩어지는 짧은 호흡에서는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항상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집착으로 인해 대상에 대한 탐욕을 끌리게 된다. 이미 앞에서 탐욕에 끌리면 호흡도 올바르게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몸과 목숨을 버린 사람'은 탐욕을 떠난 사람을 말한다. 마음이 절대 안정의 상태에 있지 않고서는 몸을 버릴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을 버린다는 말은 그것을 떠난다는 의미이다.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몸을 떠나고, 마음을 쓰면서도 마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마음과 몸을 버린 것이다. 따라서 진실하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몸과 마음을 떠난 상태가 바로 무아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의 몸을 생각하고 자아의식에 매여 있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노예가 된다. 이런 사람은 몸도 건강하지 못하고 마음도 불안하다. 또한 홉의 거칠고 산란해서 정신집중을 길게 할 수 없다.

호흡과 마음이 서로 따르는 단계에 이르면 삶과 죽음의 문제도 해결된다. 흔히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음식물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삶이라고 하고, 그것이 그치면 죽음이라고 한다. 죽음은 호흡이 그치고 심장의 고동이 정진된 상태요, 마음의 작용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를 삶이나 죽음이라고 하지 않았다. 의식이 올바르게 움직이고 생명 현상인 호흡이 올바르게 행해지는 상태를 삶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면 삶이란 올바른 생명 현상으로 호흡과 마음이 올바른 상태에서 조화되어 작동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신체기능이 없어져서 호흡이 그친 상태이다. 그러므로 호흡이 있어도 의식이 없으면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의식은 있어도 호흡이 행해지지 않고 심장도 멈추고 말기 때문이다. 

호흡과 마음이 함께하는 조화된 시간이 계속되면 삶과 죽음이 함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생사일여(生死一如) 그대로인 것이다. 생과 사속에서 호흡하며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생사를 초월한다는 말은 생과 사를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생사 속에 있되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삶 속에서 삶은 떠나고, 죽음 속에서 죽음을 떠나는 것이 참된 삶이요, 참된 죽음이다.

긴 숨 속에는 들어오는 숨이 있고 나가는 숨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의식과 함께하면서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짧은 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들숨이 삶이라면 날숨은 죽음이다. 이런 뜻에서 '긴 호흡은 생과 사가 된다.' 고 했다. 또한 여기서 '짧은 호흡은 움직이면 생과 사가 된다.' 는 말은 긴 숨 속에 포함되는 짧은 숨들이 길고 가는 숨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도에 있어서 긴 것은 짧은 것이 된다.' 고 했다. 진리 그대로인 올바른 숨은 길게 되나, 그 긴 숨 속에 짧은 숨이 있을 때에는 짧고 긴 것을 떠나서 무의식 속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도라는 의식조차 없이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숨을 의식적으로 행하여 숨을 길거나 짧게 할 수 있다. 무의식 속에서 하게 되는 잘못된 호흡을 올바른 호흡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올바른 호흡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수행해야 한다.
《잡아비담심론》 제8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隨)란 들숨과 날숨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데에 행하는 바가 없더라도 길게 되는가, 짧게 되는가? 혹은 온몸에 퍼지는 가, 한 곳에 머무는가? 멀리서 들어오는가, 가까이에서 들어오는가? 어떤 범위로 돌아오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길게 들어오거나 짧게 들어오거나, 한 곳에 머물거나 온몸에 머물거나 간에 항상 마음이 호흡에 집중되어 그것이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도록 한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행하나 드디어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행하는 바가 없더라도'가 바로 이것이다. 수(隨)란 의식적으로 따르다가 드디어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심의 세계이니,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지(止)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