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4-16. 수식으로 얻는 즐거움도 버려야 한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6:27

4-16. 수식으로 얻는 즐거움도 버려야 한다

호흡을 행하되 또한 탐욕에 떨어진다. 마음이 이미 정해지면 곧 기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땅히 날숨과 들숨에 대한 생각이 멸할 때를 헤아려야 한다. 숨이 생하면 몸이 생하고, 숨이 멸하면 몸도 멸하나 오히려 아직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기쁨이 다하여 헤아림이 이와 같아서 곧 탐이 그치기 때문이다.

해설
모든 것에는 타성이 있다. 몸을 움직이거나 정신을 쓰면 일정한 힘이 생긴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릴 때 받은 교육에 의해서 얻어지는 마음가짐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심성도 한 번 이루어지면 일정한 흐름을 형성해서 힘을 가제 된다. 이런 힘은 현생에서뿐만 아니라 전생으로부터 얻어진다고도 한다. 어쨌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이 우주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올바른 힘을 바르게 쓰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불행해진다. 습관도 우리가 익혀서 갖게 되는 힘이다. 이렇게 볼 때, 도덕적인 규범도 좋은 습관을 익히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의 계율도 좋은 습관을 기르고 나쁜 습관을 버리기 위한 노력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힘을 업력(業力)이라고 한다. 업력은 우리에게 주어진 동시에 우리 자신이 익혀서 지니고 있는 정식적·육체적인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업은 우리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인 동시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의 법칙이기도 하다. 미래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힘을 좋은 방향으로 기르면 그 힘은 훌륭한 미래를 이룩하게 만든다.

숨을 세면서 마음이 안정되면 기쁨이 생긴다. 인간의 근본 바탕은 기쁨이므로 그곳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기쁨을 느끼게 된다. 젊은이들이 잘 웃는 까닭은 아직 순수한 근본 바탕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서 어린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불교는 열반이 더 없는 즐거움의 세계라고 가르친다. 열반이란 곧 마음의 바탕에 이른 것이요, 그 바탕은 고요하기 그지없는 맑고 깨끗한 세계이다.

숨이 올바르게 행해져서 마음과 숨이 함께하면 잡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본성으로 돌아가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쁨의 탐닉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도 집착이기 때문이다. 날숨이나 들숨에 따라서 일어나는 기쁨도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가는 숨이 끊어지면서 들어오는 숨으로 이어지듯이 숨에 의해 얻어지는 기쁨도 멸하게 되어 있다. 기쁨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다.

기쁨도 예외 없이 생과 멸을 함께 지니고 있다. 기쁨을 느끼면서도 기쁨 속에 빠져들지 않으면, 곧 생사의 초탈로 이어진다. 생사의 초탈은 먼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바로 호흡에서 구할 수 있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과 일치하면서도 그에 끌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생사의 초탈이다.

호흡으로 얻어지는 기쁨을 맛보면서 그것에 탐착하지 않으면 열반의 기쁨에도 머물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대락(大樂)의 세계가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