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4-15. 진리는 코앞에 있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6:27

4-15. 진리는 코앞에 있다

도인이 도를 행하려면 마땅히 근본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것이 근본이다. 마음, 뜻, 아는 것이 근본이다. 이들 세 가지는 모두 보이지 않는다. 이미 생하면 곧 멸하기 때문이다. 근본 뜻은 다시 생하지 않는다. 뜻을 얻으면 도가 된다. 뜻은 근본 뜻이 이미 멸하면 아픔이 없으나 다시 인연이 생하면 곧 끊는다. 뜻이 정(定)하여 날로 뛰어나면, 날로 뛰어남이 뜻의 정(定)이 된다. 어느 때는 숨으로부터 뜻의 정(定)을 얻고, 어느 때는 서로 따름으로부터 뜻의 정을 얻고, 어느 때는 그침으로부터 뜻의 정을 얻으며, 어느 때는 관으로부터 뜻의 정을 얻는다. 정을 얻는 인연에 따라서 곧바로 행해진다.

해설
수행에 힘쓰는 도인은 도를 닦을 때 마땅히 근본을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근본이란 마음을 말한다. 흔히 마음은 심(心)·의(意)·식(識)의 셋으로 표현된다. 즉 말하는 마음, 의, 식은 같은 의미이면서도 다른 말로 표현된다.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에서 세친(世親)은 심, 의, 식을 동의이어(同意異語)라고 했듯이, 이들은 모두 우리의 마음이며 도를 행하는 근본이 된다 불교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 종교이다. 그러므로《법구경》에서도 '마음이 모든 법의 근본〔心爲法本〕'이라고 했다. 마음, 뜻, 인식능력의 근본은 정신인데, 이 정신은 형태가 없으므로 볼 수는 없으나 확실하게 존재하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호흡에 있어서도 마음이 근본이 되고, 도를 행하는 데에도 마음이 근본이 된다. 이런 마음은 생하자마자 곧 없어진다. 생과 멸이 찰라 사이에 행해지므로 어디까지나 생이고 어디까지가 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생하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과 별을 떠나서 생과 멸을 거듭한다. 따라서 마음을 꽉 움켜쥐고 생과 멸을 거듭하는 가운데 생멸하지 않는 도를 얻어야만 한다.

생과 멸을 떠난 근본 마음이 다시 생하면 아픔을 알게 되고, 그 마음이 다시 멸하면 아픔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근본 마음을 꽉 움켜쥐고 있으면 인연에 따라 생했더라도 곧 멸할 수 있다. 용수(龍樹)도 마음이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면서 생하고 멸한다〔不生不滅〕.'고 했다. 본래의 마음에는 아픔도 아프지 않음도 없다. 아픔은 그런 마음이 일어나서 느끼는 것이므로 인연에 의해서 없다가 생겨난 것이다. 있지도 않던 것이 생겼으므로 그 인연이 사라지면 다시 사라진다. 도인은 이러한 도리를 알기 때문에 일어난 마음에 끌리지 않고 인연에 따라 마음을 자재로 생하게 하고 멸하게 할 수 있다. 실로 '뜻을 정한다.'는 말은 근본 마음에 머문다는 뜻이다. 이러한 근본 마음은 단지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다. 또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밭을 갈아서 거름을 잘 주고 키워야 한다. 우리의 정신력은 지속적인 수련을 통해서 얻어진다. 번뇌는 날로 더해진 잘못된 마음이요, 진리로 나아가는 마음도 날로 더해진 뛰어난 마음이다. 날로 닦은 끝에 근본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꽉 잡아 올바른 방향으로만 움직이면 그것이 바로 불심이요, 부동심(不動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보살이고 부처이다.

이러한 도심(道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숨을 헤아리는 것과 숨과 마음을 서로 따르게 하는 것, 마음을 몸의 어느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 또한 몸이나 어떤 것을 따라서 관찰하면서 마음이 따라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식과 상수와 지와 관 등은 모두 흔들리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꽉 잡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정해질 수 있는 인연을 얻으면 그것이 행해져서 도가 이루어진다. '도인이 도를 행함에는 마음이 근본이다.'가 바로 이런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