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4-22. 올바른 호흡의 모습은 무집착이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6:34

4-22. 올바른 호흡의 모습은 무집착이다

수식을 할 때에는 마음이 수식에 있으나 아직 헤아리지 않을 때에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 좋은 마음과 나쁜마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마음이 있다. 사람이 숨을 얻은 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물과 좋은 색들을 관찰하라. 마음이 다시 집착하지 않으면 숨을 얻는다. 마음이 모습에 다시 집착하면 아직 얻음이 아니니 다시 더욱 정진하라. 움직임의 집 중에서 의욕이 다한 자는 여섯 가지 정(情)을 마음의 집으로 삼는다. 만물을 탐애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집이 된다.

해설
수식이 올바르게 이루어진 모습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수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을 때는 어떤 상태인가? 집중되지 않는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선과 악, 그리고 불선불악(不善不惡)이다. 선에 치우친 마음이나 악에 치우치면 모두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격동의 마음이다. 불선불악의 마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마음이니 중간상태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세 가지 마음은 비록 치우쳐서 움직이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나 어느 것이나 움직이고는 있다. 그런데 마음이 수에 집중되면 이들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이 나타난다. 그 마음은 선하거나 악하거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마음이 아니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수를 향하는 마음이다. 오로지 수에 마음을 두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나라는 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둘을 헤아릴 수 있고, 둘이라는 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셋을 헤아릴 수 있다. 넷도 마찬가지이고 다섯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열까지 세고 그친다.

올바른 마음 상태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대자연의 모든 사물을 관찰하되 좋은 것을 보도록 한다. 나쁜 것을 보면 마음의 동요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보고 기쁨을 얻으면 호흡이 길고 느리게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경우에도 대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선과 악은 두 극단이라고 했다. 이 두 극단을 떠나는 것이 중도인데, 중도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그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란 올바른 길이다. 두 극단도 아니고 그 중간도 아닌,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中)이다. 중은 곧 바른 것이요 공이며 인연생멸(因緣生滅)의 도리이다. 자연 그대로의 도리요, 법 그대로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이를 자연법이(自然法爾)라고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눈이나 귀, 코, 입 피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 따라서 밖으로 달려나간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서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서 감각 기관을 통해서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서 감각 기관을 집으로 삼아 깃들어 있다. 주인인 마음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집으로 삼고 그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탐욕도 이들을 통해 들어와 떠나지 않는다. 노여움도 이러한 탐욕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 어리석음 역시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것에 이끌리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이 삼독의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마음을 갖도록 애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