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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識)의 인연으로써 같이 모습을 관한다는 것은, 곧 식이 오음의 인연을 알고, 날숨도 관하고 들숨 또한 관하는 것이다. 관이란 오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같이 관찰하는 것이며 또한 마땅히 마음과 마음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니, 두 인연이 된다. 내면에 있으면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해설 어떤 사물을 관찰하여 그 실상을 하는 것은 아는 나와 알려지는 대상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주체인 인식작용과 객체인 대상이 만나서 얻어진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이 관찰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에 대한 관찰은 감각 기능이 그 모습을 받아 대뇌에서 처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만일 대뇌가 그것을 취사 선택하지 못한다면 혼란을 일으켜 관찰이 잘못되고 만다. 참된 관찰은 물질적·정신적 요소로서의 오음을 볼 수 있는 주체가 확립되어 이것과 저것의 인연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성립된다. 호흡을 관찰하여 들어오는 호흡과 나가는 호흡을 있는 그대로 보고, 주관과 객관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오음을 있는 그대로 연기의 도리로 보는 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찰이란 보는 마음과 보여지는 마음의 영상을 모두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마음의 올바름이나 잘못됨을 보고 호흡을 조절하게 된다. 잘못된 마음을 시정하여 마음을 올바르게 하면 호흡도 바르게 되고, 호흡이 바르면 사물도 바르게 관찰할 수 있다.
사물의 실상은 공이다. 관찰이란 그 사물의 인연을 알고, 그것이 공임을 아는 것이다. 호흡훈련으로 수식과 상수, 지가 이루어지는 단계에 이르면, 마음이 호흡에 집중되어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행해지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게 된다. 이때 의식이 호흡에 집중되면서 동시에 어떤 사물을 관찰하여 그것이 인연의 도리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물을 관찰하는 마음과 호흡에 집중하는 마음이 동시에 작용하여 조화된다. 이를 구관(俱觀)이라고 한다. 이대는 자연스럽게 마음의 장애가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안온해진다.
원효(元曉)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인연에 대한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眞)과 속(俗)이 융합되어 감연하다. 둘이 어울려서 하나도 아니므로, 진과 속의 본성은 서지 않음이 없다.〔融眞俗而堪然. 融二而不一故. 眞俗之性無所不立〕."고 했다. 또 용수(龍樹)는 중관(中觀)이라고 했다. 《잡아비담심론》제 8권에서는 "관이란 수습, 극수습하여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듯이, 그 바라는 바에 따라서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을 통해서 그것이 몸에 배면 숨을 들어오고 나가는 인연을 보게 되고, 그 숨을 떠나지 않고 오온을 바라는 대로 관찰한다는 뜻이다.
숨과 오온은 각각 객체와 주체이다. 하지만 숨과 오온이 같이 관찰되는 구관에서는 둘이 아니다. 또한 서로 조화되기 했으나 하나라고 할 수도 없다. 숨은 숨대로, 오온은 오온대로 바라는 바에 따라 얻어진다. 이렇게 되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해탈도론》에는 "수관(隨觀)이란 접촉함에 따라서 마땅히 그 모습을 관찰함이니, 여기에서 마땅히 일어나는 즐거움의 법을 따라서 관찰하라. 이를 수관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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