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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멸해서 없어진 세계를 보는 것입니까? 곧 있는 바가 없어야 멸한 세계이다. 묻되, 이미 없는데 어찌하여 (의지할) 곳이 됩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네 가지 세계가 있다. 하나는 나는 새가 머무는 공중이요, 둘째는 아라한이 머무는 열반이요, 셋째는 도의 세계인 있지 않음이요, 넷째는 법으로 관이 있는 곳이다.
해설 몸과 마음의 모든 악함을 버린 세계가 멸진처(滅盡處)이다. 한 제자가 '아무것도 갖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세계가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붓다는 '그 아무것도 없는 곳에 네 가지가 있다.'고 대답하면서 예를 들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곳, 즉 가진 것이 없는 이 세계는 마치 하늘을 나는 새가 공중을 의지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음과 같다. 새에게는 공중을 의지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다. 또한 아라한과 같은 성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열반에 머물고 있으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된다. 그런 세계에 이르러서야 사물의 실상이 알려진다. 관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멸진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걸림 없는 세계이다. 사물의 실상을 보기 위해서는 주관이 객관을 대함에 있어 그 객관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도를 깨달아서 행하는 도인에게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의지처가 된다. 도인은 그 도를 마음에 가지고 있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법을 깨달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법에 의하여 살지만, 법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 법은 천지의 만물 속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만물을 올바르게 법 그대로 관함으로써 법에 의지하게 된다.
호흡도 마찬가지이다. 호흡이 바르게 행해져, 호흡에 의지하면서도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면 그곳이 바로 멸진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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