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6-8. 아라한의 마음이 된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6:55

6-8. 아라한의 마음이 된다

뒤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는 것은 지금 나타나 있는 것이다. 죄인은 생과 사의 만남에 (죄가)있음을 보지 못하므로 마땅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뒤에 있는 바가 없음을 본다는 말은, 아직 도의 자취를 얻지 못한 것이니, 중을 얻지 못하면 생명이 다한다. 곧 이미 열다섯 가지 뜻을 얻었더라도 중을 얻지 못하면 죽는다. 마땅히 열다섯 가지 뜻만을 얻으면 곧 도에 떨어지니, 또한 바꾸어 위로 아라한에 이르러야 한다.

해설
불교는 모든 것이 연기에 법칙에 의해 존재한다고 본다. 앞으로 본다는 것은 사물의 시작이며, 뒤로 본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는 관계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모습이요, 공간적으로는 중도의 도리에 의해 존재한다고 본다. 중도란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고 인연에 따라서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니, 모든 존재는 중도 그대로이다. 이를 중도의 실상이라고 한다.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니며 동시에 아닌 것도 아니다. 이를 여여(如如)한 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용수는 비실비비실(非實非非實)이 여여의 실상이라고 설파했다.

모든 존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나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지도 않으니, 과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으므로 현재가 있다. 또한 현재에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현재, 미래에 집착하여 인연에 따른 자재를 모른다면 좌를 짓게 된다. 죄인은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에 집착하면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과 사의 만남'은 집착한다는 의미이다. 생사에 집착하여 생사 속에 있다면 생은 사로부터 있고, 사는 생으로부터 있기에 생사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삶만을 희구하고 죽음을 거역함으로써 죄를 짓게 된다.

도인의 행적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면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즉 도인은 중도를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중도를 실천하지 못하면 도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이는 곧 구사론(俱舍論)에서 말하는 열다섯 가지 수행의 마음가짐에 지나지 않고, 최후의 한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 된다. 최후의 한 마음이란 바로 중도이다. 여기서는 '중을 얻지 못하면 죽는다.'고 했다.

따라서 열다섯 가지의 견도심(見道心)을 얻는 데에 그치면 도를 보는 데에 그쳐 거기 떨어지고 만다. 여기서 다시 한 마음을 일으켜 제16의 마음을 세워 수도하면 드디어 아라한이라는 성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 열여섯번째 단계의 한 마음을 흔히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모든 실상을 관하는 마음이라고 하며, 이 마음을 얻어야 비로소 모든 번외의 혹(惑)이 끊어지는 지혜를 얻는다.

요컨대 붓다는 호흡을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환의 단계에서 제16의 마지막 한 마음까지 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호흡 수행이 여기에 이르면 모든 번뇌를 끊은 아라한의 위치에 오른다고 한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아라한araban은 적(賊)을 죽였다고 하여 살적(殺賊)이라고 번역한다. 적이란 곧 번뇌, 악 등의 그릇된 것으로, 이적을 없애야만 비로소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진다. 수식, 상수, 지, 관을 거쳐 환에 이르러 마지막 한 마음을 얻는다. 한 마음을 얻으면 도를 깨달아 청정한 세계에 있게 된다. 이것이 마지막 정의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