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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깨끗함인가? 곧 여러 가지를 탐하는 욕심이 깨끗하지 않음이니, 탐욕을 제거하면 깨끗해진다. 어떤 것이 오음의 모습인가. 비유하면 불이 근본 요소가 되고 땔나무는 모습이 되는 것과 같다. 숨(을 헤아리는 것)으로부터 깨끗함에 이르면 이것이 모두 관이 된다. 곧 몸을 관하고, 서로 따르게 하고, 그치게 하고, 관찰하고, (근본으로) 돌아와서 깨끗해지는 것은 본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안의 마음은 수를 헤아리고 밖의 마음은 나쁜 인연을 끊는다. 이것이 두 마음이다.
해설 여섯 가지 단계의 마지막인 정에 대한 설명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더럽지 않다는 뜻이다. 더러움의 대표로는 탐욕을 들 수 있는데, 이 탐욕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 해친다. 탐욕을 없애면 노여움도 없어지고, 사리를 볼 수 있는 지혜도 열리게 되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로 나올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탐욕이나 노여움, 어리석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로 오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음은 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물질적·정신적인 요소이다. 이 오음에 의해서 탐진치라는 더러움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오음은 주관 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불과 땔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주관과 객관에 의해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관계도 이와 같아서 몸이 나무라면 마음은 불이다. 마치 불과 땔나무에 의해 불이 타오르는 모습과 같이 마음은 원래 보이지 않으나 어떤 대상을 만나면 움직여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더러움인 번뇌도 이것과 저것의 인연에 의한 것으로 번뇌, 삼독도 모두 오음의 모습으로 불과 땔나무가 만나 불이 붙은 것과 같다. 불과 땔나무를 없애면 타오르는 불도 있을 수 없다. 만일 이것을 모르고 불이나 땔나무에 집착하면 타오르는 불이 우리를 태우고 말 것이다.
더러움과 괴로움의 씨앗을 없애는 수행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가는 여러 단계를 거친다. 그 단계는 각각 다르지만 생각을 한결같이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수식에서 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한결같이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관(觀)이며, 수지상(受持想)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러움도, 깨끗함도 본래는 없는 것이다. 여섯 단계가 모두 이와 같다. 일체의 것은 연기의 도리에 따르므로 근본적으로는 실체가 없고 단지 방편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연에 의한 방편이므로 있어야 할 조건이 사라지면 없어진다. 즉 인연이 없어지면 없어지고 인연이 생기면 생한다. 청정한 세계는 좋은 인연을 살려 궁극의 세계에 도달한 경지, 즉 깨달음이다. 그러나 깨달음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도리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므로 역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마음이 있다. 밖으로 나타나는 수를 헤아리는 마음과 안으로 나타나서 악한 인연을 끊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방편을 통해서 인연에 의해 나타나는 마음을 잘 다스리려면, 안으로는 정신집중력을 기르기 위해 수식을 하고, 밖으로는 나가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악한 마음을 없애야 한다.
인연에 의해 생기는 마음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즐겁게 하기도 하므로 그 방편을 잘 살리는 것이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를 얻는 단계가 바로 정, 즉 깨끗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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