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9-5. 법은 正道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7:33

9-5. 법은 正道다.

이것을 이름하여 법은 바르며, 진리에 따르면 근본이 되고, 근본을 일으켜서 뜻에 머물게 된다고 한다. 법이 바르다는 것은 곧 도법이다. 진리에 따른다는 것은 곧 사제이다. 근본으로부터 뜻의 머무름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생사로 향하는 만사는 모두 본래 뜻으로부터 일어나다  뜻이다. 곧 뜻에 머물러서 오음이 일어나므로 마땅히 뜻을 끊어야 한다. 근본을 끊으면 곧 오음도 끊어진다.
어느 때에는 스스로 끊어서 생각하지 않으나 뜻이 스스로 일어나면 조가 된다. 다시 정(定)의 길에 있지 않으면 죄가 된다.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삶은 진리에 따르면 법을 따르게 되고, 법을 따르면 올바른 삶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진리로부터 나온 법은 어떤 것인지를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법은 어디서 일어나고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붓다는 법은 진리로부터 일어나며 올바르다고 설했다. 법은 진리로부터 있게 되었으니 바르고, 또한 뜻에 머물러서 뜻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보면 법을 보는 자라고 할 수 있고, 마음의 근본을 보면 진리를 보는 자라고 할 수 있으며, 법을 법대로 행하는 자는 올바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법과 올바름과 마음은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나온다.

진리는 고집멸도의 사제로 대표된다. 사제에 이들 모두가 들어있다. 집(集)이 근본이 되어 고(苦)라는 결과가 있다. 고가 없어지면 근본도 없어진다. 나쁜 근본이 없어졌으니 올바른 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는 직선적이 아니라 상호 의지하고 있으므로 결과가 곧 원인이 된다. 올바른 길을 가면 고가 멸하고, 고가 멸하면 정도를 실천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정도의 실천으로 고가 멸한다. 생사의 도리를 설한 사제의 진리가 근본이므로 생사로 향하는 법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진리에 의지해 있으므로 만사는 생사로 향한다.

'생사로 향하는 만사는 모두 뜻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법과 마음은 다르지 않다. 마음이 진리요 법이니 만사는 마음에 따른다.

만법의 근본인 사성제의 실천에는 37종의 수행방법이 있다. 바로 《삼십칠도품경(三十七道品經》이다. 사성제의 근본원리대로 수행하면 깨달음에 도달하며, 근본을 알아서 고의 근본을 제거하여 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성제의 진리가 근본이나 원리를 모르고 집착을 일으키면 생사를 거듭하여 유한한 삶 속에서 고뇌하게 된다. 집착은 곧 마음이 모든 것이 있는 근본에 머물러서 떠나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뿌리에 머무른 마음이 집착이 되어 오온(五蘊)을 있게 한다. 오온은 우리 실존의 구체적인 구조다. 인간의 몸은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오온은 오음(五陰)이라고도 하는데,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등이다. 객관세계와 주관적인 모든 것은 이들 다섯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경에서 '뜻에 머물러서 오음이 일어나므로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했다. 오음의 집착으로 인해서 고라는 현실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고를 없애고 청정한 세계로 가려면 이 오음을 끊어야 하니, 오음을 끊으면 집착도 끊어져 정(定)에 머물게 된다. 이때 비로소 생사를 끊고 고뇌를 벗어날 수 있다.

오음 중에서 색(色)은 물질이니 객관세계이다. 수(受)는 감수작용, 상(想)은 생각, 행(行)은 의지의 움직임, 식(識)은 인식작용이니, 이들 네 가지는 정신세계이며 주관의 세계이다. 우리의 삶은 주관과 객관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다. 주객의 그릇된 관계에서 그릇된 마음이 일어나고, 그릇된 마음으로부터 그릇된 삶이 있어 생로병사가 되풀이된다. 우리의 건강도 근본은 마음에 있다. 주관과 객관의 올바른 관계에서 건강도 유지된다.

환경에 잘 적응하고 마음가짐이 올바르면 건강해진다. 고민이나 공포나 불안,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환경과 조화되면 자연히 건강이 유지된다. 건강은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갖는 것이다.

경에서 말한 '오음(五陰)을 끊는다.'는, 주체인 자신과 객체인 환경의 관계를 조화시킨다는 뜻이다. 주관에 고집하거나 객관에 집착하면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기 때문에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온을 끊으면 객관세계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글리거나 자아에 고집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오온을 끊으면 주관인 자아를 세우지 않고 객관에 집착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곧 마음의 안정이요, 한결같은 집중으로 흔들리지 않는 정(定)에 들어간 상태이다.

청정이란 바로 오온이 끊어진 상태이다. 청정은 한결같이 집착 없는 마음이 집중되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조화를 가져오는 상태, 즉 묘적청정(妙適淸淨)이다. 청정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법 그대로 조화되며 마음과 몸이 조화되고 주관과 객관이 진리 그대로 오묘하게 어우러진다.

여기에서 오온을 끊는다는 말은 오온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는 아니다. 오온은 번뇌의 근본이기도 하지만 오온이 없으면 마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오온이 실체가 없음을 알고 잘 부리면 깨달음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반야심경》에서도 '오온이 모두 공(空)이다.'라고 했다. 오온은 부정할대상이 아니라 진실한 세계인 공의 나타남이요, 공으로 간다는 뜻이다. 오온은 인간 자체이며 이 세계의 모습이다. 오온을 통해서 진리가 나타나고 오온의 생멸은 곧 공이다. 오온의 생멸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근본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생과 사는 세속의 현실이요, 불생불멸은 근본 진제다. 속과 진은 둘이 아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오온은 번뇌를 일으키기도 하고 깨달음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오온의 집착을 끊어야 오온이 산다.'가 바로 '오온을 끊는다.'의 진정한 의미이다. 오온을 끊으면 공이 되고, 공이 되면 정법(正法)이 선다. 정법은 정도(正道)이니 진리로부터 나와서 진리로 돌아가는 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