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9-9. 올바름은 고요하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7:36

9-9. 올바름은 고요하다.

정각(定覺)은 몸을 받는다. 이와 같이 법과 도를 설(說)함은 법의 정(定)을 말한다. 도를 설한다는 것은 곧 따르는 인연을 설하여 도를 얻는 것이다. 음의 받음을 본다는 것은 오음을 받는 것이고, 들어갔다는 것은 오음 중에 들어가는 것이고, 생사음(生死陰)이 있다는 것은 정(正)을 받는다는 것이다. 정이란 도가 스스로 올바르게 되는 것이니, 단지 마땅히 마음의 올바름일 뿐이다.

해설
고요한 마음속에 얻어지는 깨달음에는 맑은 거울에 만물의 영상이 있는 그대로 보이듯이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나타난다. 사물인 법이 고요함과 만나 고요함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주와 객이 만나서 하나가 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뜻에서 '정각은 몸을 받는다.'고 했다. 깨달음은 고요한 정(定)속에 있다. 정(正)과 각(覺)은 같다. 깨달음의 지혜는 마음의 적정으로부터 나타난다. 따라서 법과 도를 떠날 수 없으니 법과 도를 있는 그대로 말하면 법이 곧 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법과 정은 고요한 주관이니, 주관과 개관이 하나가 된 것이 도이다. 주객이 하나가 되어 주관은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인연에 따라서 작용하므로, 이것이 또한 도를 얻음이다.

주체는 객체가 있어야 하고 객체는 주체가 있어야 존재한다. 그러므로 주체와 객체가 인연관계에서 만나 깨달음이 있다. 이것과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곧 인연에 따라서 깨달음이라는 도가 있다. 

깨달은 사람은 오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색, 수, 상, 행, 식의 오음은 번뇌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깨달음의 근원도 된다. 오온은 모두 공(五蘊皆空)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것이요, 받아들인다고 함은 공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오음 중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오음은 공의 세계로 들어오기도 하고 공이 오음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정(定)은 일체를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계이다. 이것이 관(觀)이다. 받아들여진 것이 집착을 떠난다면 청정이요 각(覺)이다. 그러므로 정각(定覺)은 '정과 각'이라는 뜻도 되고 '정이 바로 각'이라는 뜻도 된다. 정과 각은 서로 떠나지 않는다. 정은 각의 원인이고 각은 정의 결과이니 원인과 결과는 같다.

'받아들이는 것'과 '들어가는 것'은 같다. 받아들이는 입아(入我)는 들어가는 아입(我入)이다. 입아아입관(入我我入觀)은 내가 부처요, 부처가 나라는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도와 성불이 이루어진다. 

생사음(生死陰)이란 오음이다. 오음은 생하고 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사음이 있음으로 해서 올바름이 있게 된다. 생사음이 있기 때문에 팔정도(八正道)가 있고, 죽음과 삶이 있기 때문에 생사가 없는 정도(正道)가 있다. 번뇌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다. 번뇌즉보라(煩惱卽菩提)가 바로 이런 뜻이다. 깨달음은 올바름이다. 그래서 '정이란 도가 스스로 올바른 것이다.'고 했다.

이와 같이 적정인 정과 깨달음과 생사의 음은 서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인연관계에 있다. 오음을 떠나서는 깨달음이 없고, 적정도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고요히 받아들여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는 고요함 속에 깨달음이 스스로 나타나 올바른 법이 살아난다. 이렇게 하여 깨달음 속에서 올바름을 얻으려면 먼저 심적정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숨이 올바르게 들어오고 나감에 있다고 한다. 숨이 올바르게 들어온다는 것은 오음 중에 들어오는 것이요, 숨의 나감은 오음 중에서 나가는 것이다. 들어오고 나감이 오음을 인연으로 하여 올바르게 행해지면 곧 도이다. 도는 올바름이라고 했다. 마음을 올바르게 쓰려면 마음이 적정 그대로인 정에 있어야 한다. 올바른 마음은 정 그대로이니 깨달음 자체이다.

붓다의 아나파나사티는 마음의 올바름이요 고요함이요 청정한 각이라고 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