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0-6. 마음을 그치는 법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7:43

10-6. 마음을 그치는 법

도를 행하는 마음을 그치고자 하면 마땅히 세 가지 일을 알지니, 하나는 먼저 몸의 근본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관해서 알지니라. 다만 오음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오음을 끊으면 다시 생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잠깐 기탁함과 같을 뿐이다. 마음에 알지 못하면 구도(九道)를 생각하여 스스로 증득하라. 둘째는 나가고 들어오는 숨에 마음이 따르는 것을 내관하라. 셋째는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에 대한 생각이 멸할 때에 숨이 나가서 조금 가볍다.
생각이 멸할 때는 어떤 것이 무소유임을 아는 것인가. 마음이 정(定)이면 공(空)을 알고, 공을 알면 곧 무소유를 안다. 숨이 응하지 않으면 곧 죽기 때문이다. 다만 몸은 기가 지은 것일 뿐이라고 알면 기가 멸한 것을 공이라 하게되니, 공을 깨달으면 도에 떨어진다. 
도를 행함에 세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몸을 관하고, 둘째는 한 마음을 생각하며, 셋째는 나가고 들어오는 숨을 생각한다.

해설
앞에서 도는 마음을 지키는 수의(守意), 곧 정신집중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수의는 정신이 한곳에 머무는 상태다. 그러므로 지의(止意)라고도 한다. 지의에 의해서 도가 얻어지고 도가 행해지면 지의 또한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도를 행하여 마음을 그치고자 하면 마땅히 세 가지 일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는 먼저 몸을 관찰하는 일이다. 몸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 근본을 알아야 한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몸의 근본인 오온을 끊으면 그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이 끊어짐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는 육체적인 색(色)과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힘(受)으로 뇌가 움직여 생각이 생기고 마음이 일어난다(想). 다시 몸과 마음이 서로 작용하여 이에 대한 대응력이 생기고(行), 그를 판단하여 인식하게 된다(識).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육체와 정신이 잘 어울리면 원만한 삶이 이루어진다.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의 몸이나 정신은 실체가 없고, 마치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이 순식간에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은 번갯불과 같이 허망한 속에 순간순간을 생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는 나그네에 비유하기도 한다. 잠시 맡은 몸이요, 잠시 기탁한 순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몸은 영원한 것이요, 마음도 항상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홉가지 길, 곧 아홉 가지 진리(九諦)를 생각하여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홉 가지 길이란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 유애(有愛)(상견常見), 무유애(無有愛)(단견斷見), 피단방편(彼斷方便), 유여열반(有餘涅槃), 무여열반(無餘涅槃) 등이다.

무상, 고, 공, 무아를 앎은 인생이 고(苦)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니, 도를 행하여 마음을 그치는 첫째 조건이 된다. 이로써 우리의 마음도 본래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상견(常見)과 이와는 반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단견(斷見)이 마음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그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그치고 도를 행하려면 올바른 길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이 피단방편이다. 그러면 마음이 그친 세계는 어떤 것인가. 그 세계는 번뇌가 있는 상태로 열반에 드는 유여열반이나 번뇌도 없고 몸도 없는 무여열반이다. 이러한 아홉 가지 진리를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그칠 수 있다. 아홉 가지 진리 중에서 무상, 고, 공, 무아는 고제(苦諦)에 해당하고, 유애, 무유애는 집제(集諦)가 되며, 피단방편은 도제(道諦),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은 멸제(滅諦)에 해당한다.

두 번째 방법은 숨을 관하는 일이다. 마음속으로 숨의 출입에 따라 숨을 관찰하여 마음이 숨과 함께 생멸하고 있음을 안다. 순이 들어와서 생하나 곧 나가서 멸하는 것처럼 마음도 생과 멸을 되풀이하고 잇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때 마음이 그친 고요함을 증득하게 된다. 즉 숨을 통해서 그친 마음의 세계를 안다.

세 번째는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에 따라 마음이 생하고 멸하는데, 숨이 나갔을 때 그 숨이 극치에 이르러서 다시 들어오기 직전에 마음도 완전히 쉬게 되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출식과 입식의 생각이 멸할 때에 숨이 나가서 조금 가볍다.'고 했다. '조금 가볍다.'는 말은 바로 유여열반에 해당한다. 숨이 다 나가면 다시 들어와서 생이 있으므로 완전한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여열반은 아직 생명이 있으므로 완전한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여열반은 아직 생명이 있으므로 완전한 열반이 아님과 같다.

그러나 생각이 멸할 때에는 무소유(無所有)의 상태를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무소유의 세계가 마음속에 증득된다.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고요히 머물러 있으면 그것이 공(空)의 세계이다. 숨의 출입으로 생각의 지멸을 알고, 생각의 지멸을 통해서 무소유를 알고, 무소유를 알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공을 안다. 공을 알면 무소유를 안 것이다. 무소유가 곧 공이기 때문이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는 마음이다. 호흡의 나가고 들어옴도, 마음의 생멸도 모두 무소유의 실천이다. 생에 집착하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 않는 잘못된 호흡이 된다. 사물에 얽매여 고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무소유를 실천하면 생한 마음이 멸하여 모든 고뇌가 없어진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숨이 응하지 않으면 곧 죽는다.'는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없으면 곧 죽는다는 뜻이다. 들어온 숨이 나가고, 나가면 다시 들어와 생과 사가 되풀이되면서 죽지 않고 이어진다.

공(空)은 마음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동시에 몸의 기운이 없어진 상태이기도 하다. 기운의 생멸은 생명의 생멸과 같다. 기운의 일어나고 멸함이 되풀이되면서 생멸에 집착없이 걸리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공의 실천이다. 멸에 떨어진 것만이 공이 아니다. 생에만 집착해도 공이 아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에 집착하지 않음이 공이다.

그러므로 기(氣)의 생멸에 의해서 공을 깨닫는다. 숨의 출입식을 통해서 공을 알고, 마음의 일어나고 없어짐을 통해서 공을 알며, 몸이나 마음의 기의 생멸을 통해서도 공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공을 깨닫고 실천하면 곧 도(道)에 들어간다. 즉 '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도에 들어간다는 말이나 도를 안다는 말은 같다.